▲1998년 10월 27일 임진각에서 소 5100마리를 실은 트럭과 합류한 정주영 회장이 통일대교 부근에 마련된 환송행사장에서 소의 고삐를 잠시 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북 출신들은 남한에서 상당한 사회·경제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탈북민', '북한이탈주민', '북배경주민' 같은 표현과 달리, '이북 출신'이란 표현은 경제적 빈곤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서울 청계천변의 평화시장도 이북 출신들의 염원을 반영한 명칭을 담고 있다. 실향민 특집인 1995년 6월 11일 자 <동아일보> 11면은 "(이북 출신들이) 50~60년대 서울 평화시장·남대문·동대문시장, 부산 자유시장 등의 상권을 장악하기도 했다"라며 평화시장 명칭에 그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이 기사는 "실향민들 중에는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씨를 비롯, 장진호 진로그룹, 박용학 대농, 서성환 태평양, 최순영 신동아, 조내벽 라이프, 장병희 영풍그룹 창업주 등 특유의 뚝심과 생활력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사도 적지 않다"라며 "89년 창립된 동화은행은 이북 출신 실향민 1백 20만 명이 주주로 설립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북 출신들은 남한 출신 이상으로 남한에서 기반을 잡았지만, 이승만 집권기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인 이름으로 호명됐다. 1954년 11월 11일 자 <경향신문> 3면 우하단은 이북 출신들을 폄하하는 용어로 "삼팔따라지"를 언급했다. 이 기사는 "총단결해야 할 우리 민족을 간접적으로 분렬시키는 말"이라며 이런 차별적 단어를 쓰지 말자고 권유했다.
2009년에 <한국언론학보> 제53권 제5호에 실린 주창윤 서울여대 교수의 논문 '해방공간, 유행어로 표출된 정서의 담론'은 삼팔따라지(38따라지)라는 말이 1945년부터 유행했다고 말한다. 그해 하반기 서너 달 안에 이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4년에 <광장> 제134호에 실린 박갑수 서울대 국어학 교수의 기고문 '해방 후 생활변천사 10 / 언어 : 삼팔따라지에서 메달리스트까지'는 삼팔따라지에 관해 "이는 월남한 사람을 자칭·타칭으로 이르던 말로,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된 것을 나타내는 말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따라지란 물론 한 끗을 이르는 노름판 용어"라고 덧붙인다. 삼팔선이 그어진 시대 상황에 화투판 용어가 어우러진 이 단어가 이북 출신들을 폄하하는 데 쓰였던 것이다.
위 주창윤 논문은 "38따라지가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확대된 배타적 지역 정서였다"라며 "해방 공간의 경제적 어려움은 주변부 삶을 살았던 월남 동포에게 전가"됐다는 말로 이 단어의 확산 배경을 설명한다. 급격한 인구 유입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곤란해진 일반대중이 이북 출신들을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이 말이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처럼 삼팔따라지로 불리며 남한 대중의 눈총을 샀던 이북 출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회의 주류 집단으로 떠올랐다. 같은 시기의 일본발 귀환자들은 이들보다 2배 이상 많았지만 그 나름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반면, 이북 출신들은 오늘날까지도 특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반공이념하에서 이북 정권이 적대시되는 가운데서도 이북 출신들만큼은 남한에서 대우를 받았다. 또 반공정권들의 분단정책 속에서도 이들의 염원을 반영하는 이산가족 상봉 정책만큼은 계속해서 추진됐다. 그 어떤 반공정권도 이들의 염원에 함부로 재를 뿌리지는 못했다. 이 사안에 대해 소극적인 쪽은 남한 정권이 아니라 북한 정권이다.
사실,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보다 일본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 더 부각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직후에 그 지배하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주목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 상당수가 강제징용으로 끌려갔으므로 배상 문제 때문에라도 이들이 국가적 관심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처지를 배려해 줄 국가권력은 그 후 오랫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그들이 뭉칠 수 있도록 이 사회가 틈을 주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1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대거 귀국했으면서도 이들의 목소리가 결집되지 못했다. 이는 이들의 경제·사회적 지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도 생존력이 강했지만,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한 편이었다. 그들이 북을 떠난 이유에서도 확인되듯이, 많은 재산을 유지하거나 증식하는 일에도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이북 출신들이 남한에 쉽게 정착한 데는 이런 요인들도 당연히 작용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인들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남과 북이 적대하게 되면서, 이북을 이탈한 사람들의 존재 가치가 남한에서 높아졌다. 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들의 숫자가 매우 많아졌다. 위의 1995년 실향민 특집이 보도될 당시에 남한 내의 이북 출신은 700만을 넘었다. 1995년 당시의 대한민국 인구는 4509만이었다. 이는 이북 출신들이 남한에서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요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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