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된 사직 전공의의 석방을 요구하는 경기도의사회의 공식 항의 포스터.
경기도의사회
일부 의사들의 소양 문제의 심각성은 오래전부터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월, 의료 공백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을 때 서울대 의대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학장이 한 졸업 축사가 화제가 됐습니다. 김 학장은 신경외과 전문의로, 뇌혈관 수술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요즘 필수의료, 지역의료, 공공의료 붕괴에 따른 의대 정원 증원, 의사과학자 양성 등 사회적 화두에 대해 국민들은 우리 대학에 한층 더 높은 사회적 책무성 요구하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김 학장은 졸업생들을 향해 "국민들 눈높이에서 바라보라"고 말하며, "여러분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에 숨어 있는 많은 혜택 받고 이 자리 서 있기 때문"이라며 사회적 혜택의 수혜자임을 상기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의사가 숭고한 직업이 되려면 경제적 수준이 높은 직업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직업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받은 혜택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의사, 사회적 책무성을 위해 희생하는 의사"가 돼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이 탁월한 축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토록 깊은 감동을 주는 축사도 드물었습니다.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되돌려 주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당부조차 비난을 무릅쓸 용기가 필요해진 탓일 것입니다.
김정은 학장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축사 이후 동료 의사들로부터 비판과 걱정의 말을 많이 들었노라고 밝혔습니다. 의료계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그가 비난받을까 염려한 동료도 있었지만, 대놓고 "그런 얘기는 시의적절하지 않다"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김 학장은 "평소 소신이었고 누구를 편든 것도 아니"며, "(주위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의사의 사회적 책무'를 언급하는 게 다른 의사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그런 의료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와 동떨어진 일부 의사들과 의대생들의 인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기초적 상식과 소양도 못 갖춘 '의료기술자들'

▲정부의 공공의대 정책을 비판하는 의료정책연구소 페이스북 게시물 중 일부
의료정책연구소 페이스북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에도 의사들은 의대 정원 증원 시도에 극렬히 반대해 집단행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 연구소는 대국민 설문조사 형식의 홍보물로 시민들을 유도하고 설득하려 했습니다. 의도와 달리, 뭇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요.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 지을 중요한 진단을 받아야 할 때, 의사를 고를 수 있다면 둘 중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 매년 전교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
ⓑ 성적은 한참 모자르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
결국 이 설문은 시민들을 설득하기보다, 의사들의 집단적 의식구조만 선명히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제가 의사를 고른다면, '의사로서 직업의식과 책임감'을 가장 먼저 볼 것 같습니다. 의사의 현재 역량을 입증할 수단이 까마득한 고등학교 시절 성적뿐이라면, 의사 자신이나 한국의 의료현실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요?
저는 의료계의 문제가 '병원 뺑뺑이'로 대표되는 의사 부족이나, 필수의료 분야의 이탈 가속, 그리고 의대 정원 증원으로 촉발된 의사집단의 행동이라는 '숫자'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블랙리스트' 집단 괴롭힘으로 구속된 사직 전공의와 그를 옹호하는 의사와 의대생들의 출현은 한국 사회가 시민으로서의 기본 소양도 갖추지 못한 의료기술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는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 의료교육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시민이 갖춰야 할 교양을 갖추기 전에 의대로 진학해 특권의식부터 쌓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경우, 의과대는 의과전문대학원 체제로 운영돼, 대학에서 기초과학, 인문학, 공학 등 다양한 전공과 교양수업, 연구 경험을 쌓은 졸업생을 대상으로 지원서를 받습니다.
제게는 의대 정원 증원에 의대생 부모들이 나서는 광경이 매우 기괴해 보였습니다. 그들이 이 문제에 결정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는지는 둘째치더라도, 의대생들 대다수가 성인인데도 부모를 대리인 삼는 것은 아직 유아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 징표처럼 보였습니다.
의사집단과 정부는 서로 비난하는 것으로 수개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부가 올해 초부터 이어진 의료계 집단행동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점에서 책임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의사집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집단은 수년간 의대증원 시도 자체를 봉쇄하려고 했을 뿐, 아무런 융통성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태 시작부터 증원 결사반대를 넘어 "정원 축소"까지 주장해 왔으니까요.
의대 증원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해결로 나아가는 첫걸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시민 1000명당 의사와 병상 수를 나타낸 그래프
OECD
의사들은 의대 정원 반대 이유가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사실부터 솔직히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의료의 수요와 공급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는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와 병상수 사이의 괴리가 그것입니다. 한국의 인구 대비 병상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많은 반면, 의사수는 최하위입니다.
병상수는 1000명당 12.8개로, 일본을 추월해 1위가 됐지만 의사수는 바닥이어서 최저를 기록하는 2.5명인 멕시코에 이은 2.6명입니다. 이조차 한의사를 포함시킨 경우이고 이들을 제외하면, 의사 수는 2.1명으로 떨어져 확실한 꼴찌가 됩니다. 더구나 한국의 고질적인 전공의들의 80시간 장시간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력을 늘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회는 일과 삶의 균형을 지향하고 있고, 여기에 의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의사단체들은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필수의료 붕괴가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당연합니다. 의사 수가 는다고 한국 의료계의 고질적 문제가 일거에 해소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필수의료에 의사들이 더 많이 진입하고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거나 과다 보상되는 영역의 수가 조정이 필요하고, 의사들을 삼키는 블랙홀이 된 비급여진료의 적절한 통제가 따라야 하며, 무엇보다 극도로 상업화 돼 가는 의료의 공공성도 회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돈이나 특권보다 사람 살리는 데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의사가 되도록 입시제도를 개혁하는 작업도 시작해야 합니다.
의대 증원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해결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이것이 다른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는 지경까지 나아가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한 대형병원 응급의료센터 대기실 인근에서 한 내원객이 아이와 함께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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