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칠곡지역에서 항일운동 5명. 가장 왼쪽이 채충식.
민족문제연구소
23번이나 검거된 채충식
대구항쟁이 대구폭동으로 불리며 진실이 왜곡되는 현실을 슬프고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본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이 채충식이다. 칠곡과 대구 지역의 저명한 활동가였던 그의 이름을 일제강점기 유력 일간지에서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34세 때 발행된 1927년 11월 19일 자 <조선일보> 5면 중간에 이런 기사가 있다.
"경북 칠곡군 신간회 총무간사 채충식 씨는 모사건 피의로 왜관경찰서에 검거되엇든바 지난 십오일에 경북경찰부로 호송하얏다가 그 이튿날인 십륙일 대구에서 방면되엇다고."
일제강점기 신문보도에서는 독립운동 사건이 명시적으로 표기되기 힘들었다. '모(某)사건'이란 표현은 그런 분위기의 산물이다. 그가 '모사건'으로 끌려간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경북사학회가 발행하는 <복현사림> 제32집(2014년)에 실린 역사학자 김순규의 기고문 '좌파민족주의 독립운동가 채충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23차례의 검거와 투옥을" 당했다고 소개한다.
민족주의운동을 하던 작곡가 홍난파는 1937년 6월 구속돼 고문을 받고 두 달 뒤 석방된 다음에 11월에 가서 전향서 성격의 반성문을 썼다. 그런 뒤 다시는 이쪽에 발을 담그지 않고 친일파의 길을 걸어 나갔다. 23차례나 검거된 채충식은 8·15 해방도 감옥에서 맞이했다. 끈질기고 굽힘 없는 '모사건 전문가'였던 것이다.
그의 일생을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한 <디지털달성문화대전> 채충식 편은 출생 연도를 1892년으로 표기하면서 생일이 음력 11월 15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임진년인 그해의 음력 11월 15일은 양력 1893년 1월 2일이었다. 음력 11월 15일에 출생한 게 맞다면, 위 사이트나 논문 등에 적힌 1892년은 1893년으로 정정돼야 한다. 위의 "34세"라는 표현도 1893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지금의 대구시 동구 미대동인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인천 채씨 집성촌에서 출생하고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한 채충식은 일찍부터 민족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왜관청년회 산하의 여자야학부 및 동창학원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칠곡기근구제회 창립을 주도했다. 또 칠곡·선산·상주 3개 지역 언론인 단체인 삼군기우단(三郡記友團) 결성에 참여하고, 여운형 등의 참여하에 농민생활 향상을 지향한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 이사로 활동했다.
그에 더해, 국내 최대의 좌우합작 민족주의단체인 신간회의 칠곡지회 의장으로도 일하고 신간회 본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는 여운형이 이끄는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경북지부에서 활동했다.
조선건국동맹을 제외한 나머지 활동들은 대체로 '합법공간'에서 벌어졌다. 일제가 웬만하면 금지하지 않는 범주에서 이뤄졌다. 그런데도 23차례나 검거됐다는 것은 일제가 볼 때 그가 상당히 골치 아픈 존재였음을 의미한다.
장기간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기여도도 높지만, 일제 경찰의 의심을 사면서도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지 않아 검거와 석방을 되풀이한 독립운동가들의 기여도 역시 높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중되는 속에서도 국내 항일조직이 붕괴하지 않은 것은 채충식 같은 활동가들이 끝끝내 버텨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회와 민족에 헌신하며 일제강점기를 보낸 그에게 답례가 되어 돌아온 것은 10월 항쟁을 계기로 아들을 잃은 일이었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채충식을 독립운동가로 지칭하면서 "항일운동가 채충식의 아들인 채병기(1925, 달성군)는 대구10월사건에 참가한 뒤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피해 다니다가 1950년 6·25 직후에 대구경찰서 경찰에게 강제연행된 뒤 불상지에서 살해되었다"고 기술한다.
아들의 죽음... 후손들까지 피해 볼까 봐 노심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