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시절 이진호
위키미디어 공용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4권 이진호 편은 그의 핵심 죄목 중 하나로 "3·1운동 당시 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전라북도자성회의 조직에 관여"한 일을 열거한다. 그는 자위단의 또 다른 이름인 자성(自省)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전북 사람들 앞에서 '자성하자!'고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당시 전라북도장관이었던 이진호가 자성회를 운영한 방식은 위 보고서에 인용된 <데라우치 마사타케 문서> 제31책에서 확인된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이진호는 유세원들을 집집마다 파견해 취지서를 보여주고 서명을 받는 방식으로 여론 흔들기에 나섰다.
2016년 촛불집회에 맞서 맞불집회를 일으킨 극우세력도 집집마다 방문하는 성의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진호를 비롯한 1919년 당시의 친일 극우세력은 그런 성의를 발휘했다. 자금과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진호는 유세원들을 파견하고 감독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역 책임자인 그가 직접 현장으로 뛰어나갔다. 위 이양희 논문은 "전라북도에서는 군산·정읍·고창·부안·김제·익산·옥구에서 도장관 주도하에 간담회가 개최되었다"라며 "전주에서는 도장관 및 군수를 비롯한 고위 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수백 명을 모아 일본기독교조합 강사의 시국강연을 개최했다"고 설명한다. 논문은 우쓰노미야 다로 조선군사령관이 이진호을 두고 "한국인 중 제일의 우군"이라고 호평한 일을 소개한다.
전국 곳곳에서 한국인들이 목숨 걸고 만세를 외치는 동안에, 이진호 같은 친일파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포섭하기 위해 가가호호를 방문하고 대중집회를 열었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친일했을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자성을 외치며 전국을 누비는 모습은 친일파들이 얼마나 자발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는 등 승승장구
고종 임금 초기인 1867년 한성에서 출생한 이진호는 15세 때인 1882년 무과에 급제했다. 그 직후 그는 무관 이외의 다양한 것들에도 도전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진호 편은 "통역관 양성소 동문학에서 영어를 공부했다"라며 "이를 바탕으로 1886년 3월에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세운 의학교 제중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고 기술한다.
이처럼 10대 때 미국 쪽으로 기울었던 그는 27세 때인 1894년에 동학혁명을 겪으면서 일본 쪽으로 기울게 된다. "1894년 10월 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발족한 양호도순무영의 교도소영관을 맡아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일본과 함께 한국 민중의 반외세·반봉건 혁명을 진압하는 이진호의 27세 때 모습은 52세 때인 1919년에도 거의 비슷하게 재현됐다. 한 개인이 25년 간격으로 벌어진 두 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비슷하게 반응했다는 것은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해도 과하지 않다. 민중에 대한 친일 보수세력의 시각이 두 시기 이진호의 모습에서 묻어난다.
일본은 1894년에 조선을 무단 침입한 뒤 조선군과 청나라군과 동학군을 연달아 꺾었다. 그러는 동안에 경복궁에 갇혀 일본의 내정간섭을 지켜봐야 했던 고종은 1895년 11월 27일(음력 10.11) 경복궁 동북쪽 모서리인 춘생문을 통해 궁을 빠져나가려 하다가 실패했다(춘생문 사건). 일본과 친일파가 없는 데 가서 독자적인 왕명을 내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 5월 6일자 독립운동가외전 임최수 편에서 서술했듯이 그때 고종의 발목을 잡은 인물이 이진호다. 친위대 대대장인 그는 고종을 위해 대궐 문을 열어주는 책임을 맡았다. 그랬던 그가 김홍집 내각에 제보하고 고종의 탈출을 차단했다.
임금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시절이다. 그런 시대에 임금을 호위하는 친위대 장교가 임금의 신병을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일본과 제휴했다. 일본을 그만큼 좋아했다는 방증이다. 이는 그가 전년도에 일본군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한 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일본군과 손잡은 게 아니라는 판단이 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