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농성 중인 강주룡과 당시 신문 보도(신문 보도 저작권은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31년 5월 29일, 새벽부터 당시 약 11m 높이 평양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1인 시위를 벌였던 평양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의 모습. 임금 삭감에 반대하고 공장주의 횡포를 고발했던 그는 9시간 30분 동안 버티다 결국 경찰에 체포됐고, 단식 투쟁을 벌이다 건강 악화로 풀려났으나 그 해 여름 31세 나이로 숨졌다고 알려져있다.
북하우스 제공
평양 시내가 내다보이는 을밀대 위에 올라 고무농장의 착취를 고발하던 강주룡부터 한진중공업 조선소 크레인 위에 올라 고공 농성했던 김진숙에 이르기까지. 저자 남화숙은 여공 투쟁의 역사 가운데서 핵심으로 손꼽을 수 있는 순간들을 집중 조명한다.
해방 후부터 박정희 시기까지의 노동사와 여성사, 지성사를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으로 미국역사학회가 동아시아 역사 부문 저작물에 수여하는 제임스 팔레 저작상(2023) 등을 수상했다. 여성노동 역사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고자 온갖 사료를 섭렵한 저자의 치밀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뒤쪽에 실린 참고문헌은 이백 편을 훌쩍 넘는다.
산업이란 큰 말 뒤에 숨은 개개인 여성 노동자들
저자는 노동운동가 강주룡과 김진숙의 공통점을 이렇게 꼽는다. 언변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전술로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 희생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서 여성 노동자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무너뜨리는 인물"들을 시대별로 복원한다. 국내 민주노조 운동의 '큰언니'로 불리는 이철순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독자에게 묻는다.
"그때 우리가(여성 노동자가) 없었더라면?"
실제로 여성 노동자가 없었다면 국내 제조 산업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었을까. 저자는 가산디지털단지(가리봉동)를 누볐던 섬유공장 여공들, 부산 방직공장과 김진숙이 올랐던 크레인에 이르기까지, 여공이라는 존재가 한국 근현대사에 어떤 기여를 해왔는지, 어째서 여공의 존재는 노동운동사 주변부에 머물렀는지 조목조목 들여다본다.
이 책은 늘 뒤에서 묵묵히 생활을 도왔으나 저평가되어 온 할머니의 할머니, 엄마와 이모, 국내로 이주해 생계를 부양하는 여성 이주노동자의 생을 복원하는 작업과도 닮아 있다.
중산층 계급이 아니더라도 공장 노동자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교육을 받으며 언론에 자기 목소리를 전달해온 여공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식민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항하며 농성을 거듭하다 구속된 부산의 고무농장 여공 박순희, 1933년 소회제사(섬유공장)에서 파업을 이끌고 경성방직 영등포 공장과 조선견직에서 조직가로 일한 유순희도 그중 한 명이다.
이들은 동맹파업을 거듭하며 성차별이 극심했던 1930년대, 산업 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부산 조선방식(조방) 여공들은 "흔히 여자는 다 어리석"은 존재로 바라보지만 "동맹파업을 일으킨 뒤로 단결된 굳센 힘은 회사 중역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라며 진취적인 면모를 언론을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
1920년대 여공들은 진취적인 이미지로 대중들 사이에서 통용된 바 있다. 김기영의 영화 <하녀>에서 여공은 공장 생활 후 서양식 복장을 하고 노래를 배우며 문화를 즐기는 이미지로도 쓰였다. 그러나 차츰 언론은 공장 내 착취에 대항해 단식 농성을 이어가는 여공들에게 "비참한 삶에 울부짖는 가난한 여자들"이라는 이미지를 씌웠다.
성인 남성을 '표준 시민의 디폴트(기본값)'로 세우자, 여성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손쉬워졌다. 파업에 몰두하는 여성 요구를 경청하는 대신 그들의 고유한 권리를 우리 시대는 사회적 편견에 '희석'시켰다. 노동자로서의 자율권 대신 '파란만장하고 억센 여자' 꼬리표를 붙였다. 여공들의 수난은 박정희 시대가 되면서 극심해진다.
여공이란 말 없지만 여전한 비정규직
중학교 시절, <전태일 평전>을 읽고 잠 못 드는 날을 보냈던 나는 여성 노동자가 쓴 이야기를 찾아 읽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1962년 10월, 동료가 일하던 도중 폭력과 모욕을 당하던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전남방직 섬유 노동자 '김양'은 25살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이 노동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 부산의 한 재화 업체 노동자였던 권미경은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는 유서를 왼쪽 팔뚝에 남겼다. 나는 그가 투신한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