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택시 승강장. 자료사진.
연합뉴스
하루 영업하는 동안 택시 손님은 평균 25 명 내외다. 그 중에 진심으로 반갑게 먼저 인사를 하는 마음씨 고운 손님이 두세 명은 된다. 대부분의 손님은 우리가 보통 여느 가게에 들어서고 나갈 때와 같이 무례하지도 않고 깍듯하지도 않은 무심한 모습으로 차에 타고 내린다. 그리고 거의 매일 예외 없이 형태와 종류를 달리하는 한두 명의 문제적 손님이 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의 개념과는 사뭇 다를 수 있지만 택시도 문제적 손님의 비율이 5% 내외다. 10% 내외로 상대방을 밝게 배려해주는 이타적 손님이 있고, 20% 내외의 손님은 살짝 긴장감을 들게 하는 날카로움을 비친다.
나머지 손님들은 내가 알아차릴 만한 어떤 내색도 없이 조용하게 이동한다. 하지만 이동 중에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좋은 건 좋은 방식으로 나쁜 건 나쁜 방식으로) 거기에 맞는 반응을 한다. 대체로는 그 방식을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사회 통념에서 허용하는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5%의 문제적 인간들이 보여주는 방식은 전혀 예상할 수 없고 예상되지 않은데 결과는 항상 예상을 뛰어 넘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몇 년 전 일이다. 투잡으로 택시를 시작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생초보'였다. 손님을 태울 때마다 초긴장을 할 때였고 손님에게는 그야말로 극존칭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레벨의 예절로 수행하고 있었다.
강남 주택가에서 모녀를 태웠다. 대화를 들어 보니 중학생으로 보이는 딸과 함께 어디 학원에 등록 전 평가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미 출발부터가 늦었다. 게다가 도로는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성마른 목소리로 아저씨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라는 명령조 말에 그치지 않고 뒤에서 계속 씩씩대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생초보' 답게 금방 고객의 마음에 빙의되어 최대한 빨리 가려 노력했지만 이미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로 인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으로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저씨 아니 옆에 차선이 비어 있으면 그리 가야지 왜 이 차선에서 가만히 계시는 거예요!" 얼굴까지 붉어지면서 내는 큰 소리였다. 순간 너무 깜짝 놀라고 당황해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버럭 어머니와 사과하는 딸
잔뜩 밀려 있는 몇 개의 차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중이라 그녀의 말대로 해도 결국은 곧 나란히 달리게 되어 있는데 그런 설명이 그녀에게는 전혀 의미없는 상태라는 데 나는 더 절망하고 있었다.
차는 꼼짝 않고 말은 소용없고 뒤에서는 계속 큰 소리로 신경질을 부리는데 머리만 하얘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네비게이션 안내가 시내 도로를 우회하는 고속화 도로를 가리켜서 차선을 변경하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목소리로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지금 이 시간에 그 도로가 얼마나 막히는데 그 쪽으로 가는 거예요!"
나도 내심은 화가 잔뜩 나 있었지만 노련한 대처를 하기에는 내가 아는 상식이나 경험치가 너무 모자랐다. 나는 손님에게는 그저 끝까지 정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소리를 지르는 손님에게는 차를 멈추고 운행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그 때 나는 알지 못했다.
"손님. 네비게이션 안내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가 싫으시면 그럼 원하시는대로 가 드리겠습니다."
"아니 지금 다시 저쪽으로 가면 더 늦잖아요. 그냥 가던 대로 가세요. 하지만 괜히 이쪽으로 와서 더 늦기만 해 봐 절대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
계속되는 큰 소리에 나도 분노감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가만히 하지만 고통스럽게 앉아 있는 중학생 딸의 표정을 보니 뭐라 항의 할 생각이 수그러졌다. 차는 고속화 도로에 들어섰고 그녀의 말과는 달리 도로는 크게 막힘 없었다. 차는 술술 달려서 예상 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가 막힘없이 도로를 달리는 동안 폭발하던 그녀의 입이 조용해져 있었는데 차가 멈추니 한 마디 말도 없이 여전히 성난 얼굴로 딸보다 먼저 성큼 내려서는 걸어가버렸다. 엄마가 폭발하는 동안 난처하고 잔뜩 풀죽은 표정으로 웅크리고만 있던, 생김은 엄마를 닮지 않았던 중학생 딸은 천천히 차에서 내리는 잠깐 동안 내게 진심을 담은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저씨. 죄송해요."
소녀가 내게 준 말은 오는 동안 속에 쌓였던 울분을 일순간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나는 분노조절이 안 되는 엄마를 둔 그 소녀의 주눅 든 표정과 말투가 더욱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