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령에 따라 설치, 운영 중인 전남지사 소속의 '여수·순천10·19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 실무위원회'. 여순사건 진상규명 신고 접수 및 조사, 희생자 및 유족 심사 결정을 위한 조사,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 집행에 관한 사항을 처리한다.
전라남도
제14연대 군인들의 궐기 명분에 더해 이들의 조직 구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국군에 속해 있었지만, 실상은 여수 주민들의 군대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6권은 "14연대 모병이 마을마다 할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연대 의무병 곽아무개의 증언을 소개한다.
박정희의 친구이자 제4연대장이었던 이한림은 자기 휘하의 부연대장인 이영순을 제14연대장으로 파견할 당시에 이영순 휘하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한림 회고록인 <세기의 격랑>은 "이영순 소령은 기간요원과 제1대대 병력을 인수받아 가지고 여수로 내려가 항공부대 자리에 제14연대를 창설하였다"고 회고한다.
1948년 창설 당시 제14연대의 정원은 3천 명이었다. 지난 6월 30일 <호남학> 제75집에 게재된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논문 '제14연대의 창설과 변화'에 따르면, 이영순은 "제14연대를 창설하는데, 제4연대에서 기간요원 50명을 데리고 여수에 가서 창설하였다"고 회고했다. 기간요원 50명과 1개 대대 병력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머지 병력은 의무병의 증언처럼 여수·순천 현지에서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노영기 논문에 따르면, 제14연대의 어느 하사관은 "여수·순천·광양·구례로 돌아다니면서 모병을 해오는 거예요"라며 신병 충원 방식을 설명했고, 여수 백야도 출신의 14연대 군인은 "입대하면 배고픔은 면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을 청년들과 함께 자원 입대를 하였다"고 구술했다.
제14연대가 주로 현지 청년들로 구성됐다는 것은 4·3 진압명령을 거부한 이 부대의 행위가 지역민들의 정서와 상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현지인 사병들의 협력을 받아 현지에서 거사를 벌이는 소수의 리더들이 현지인들의 정서도 고려하지 않고 일을 벌였을 리는 만무하다.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소수의 군인들이 주동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이지만, 현지 출신 병사들이 호응해주지 않았다면 여순사건은 일어날 수 없었다.
봉기한 무장세력 중에는 제14연대뿐 아니라 현지 민간인들도 섞여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명칭과 달리 하급군인뿐 아니라 한양 주민들에 의해서도 주도됐듯이, 여순사건 역시 군인과 주민들의 협력하에 전개됐다. 2천에서 5천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그중 상당수가 민간인이었던 것은 이 사건이 민중의 참여 속에 전개됐음을 방증한다. 애매하게 희생된 민간인들도 있었지만, 현지 출신 군인들에 더해 현지 주민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이 사건은 파괴력을 띨 수 있었다.
여수·순천과 이웃 지역 출신의 제14연대 군인들과 현지 주민들이 출동명령 거부에 공감을 표시한 것은 남북분단을 거부하는 제주도민들에 대한 진압 명령이 부당하고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명분으로 궐기한 바다 건너 제주 이웃에 대한 이승만의 탄압이 옳지 않다는 지역민들의 항의 표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거이고 항쟁이었다는 전제하에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번 교과서 검정 같은 일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5·18처럼 여순사건도 의거였다고 공식적으로 못을 박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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