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1일 전국 56개 영화제가 연대한 (가칭)국내개최영화제연대가 "2024년 영화제 지원 예산 50% 삭감을 철회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국내개최영화제연대
2024년 영발기금 정부예산안을 받아 든 영화계는 충격에 빠졌다. 가장 먼저 애니메이션 예산 삭감에 대해 애니메이션 협회·단체의 연대체인 애니메이션 발전연대와 27명의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이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전국 8개 지역 독립영화협회와 지역 영화단체가 지역영화 생태계를 파괴하는 예산 전액 삭감 결정을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전국 56개 영화제가 연대한 (가칭)국내개최영화제연대도 예산 삭감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영화인과 영화단체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9월 공개된 2025년 영발기금 예산안에서도 지역영화 지원 예산과 애니메이션 지원 예산은 복원되지 않았고, 영화제 지원 예산은 5억 원 증액에 그쳤다. 영화인들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영진위 위원 대다수도 동의하는 사업 예산은 왜 편성되지 못하는 걸까.
지난 8월 1일 조국혁신당 김재원 의원, 더불어민주당 임오경·강유정·조계원 의원과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가 공동주최한 '영화발전기금 2025년 예산안 긴급 점검 토론회'에 참여한 많은 영화인이 가장 궁금해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영발기금 편성 문제의 답은 위에 인용한 박기용 위원장의 발언에 있다. "한국 영화 진흥을 책임지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가 방향성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판단하거나 정하지 못하고 예산 문제 때문에 기재부에서 시키는 대로, 문체부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한국 영화진흥정책의 현실, 영진위의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현실은 정당하지 않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의 진정한 의미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팔길이 원칙'은 영국 정부가 1946년 설립하며 천명한 대영예술위원회 운영원칙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 과정에서 영국 정부는 예술과 문화의 부흥이 전후 시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회복하고 사회를 통합하며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해 세계 최초의 국가 예술지원 기관인 대영예술위원회를 설립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문화예술지원이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고 독립적인 의사결정 과정과 자율적이고 공정한 운영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팔길이 원칙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문화예술정책의 기조로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그 이후 대부분의 정부는 팔길이 원칙을 문화예술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천명했다. 흔히 정부나 공공기관이 문화예술 행정을 펼칠 때 헌법이 보장하는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런 의미만은 아니다.
이는 대영예술위원회의 재정지원에 관한 원칙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문화예술을 위한 재정지원 원칙이 흔들리지 않도록, 정부가 재정지원은 하지만 지원금이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되느냐의 쓰임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민간 예술인으로 구성한 위원회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정치적 합의를 하였고 그 결과를 팔길이 원칙이라 부른다.
국가 문화예술 정책의 방향성과 총재정의 규모는 정부와 문화부처가 결정하지만, 세부적인 예산편성과 집행은 관료가 아니라 현장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자율적으로 편성하고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 대영예술위원회 재정지원 정책의 핵심 내용이었다.
영국의 계약법에는 팔길이 계약이라는 개념이 있다. 중세 상법에서 비롯된 것인데, 상업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도입한 방법이 계약의 당사자가 서로 독립적이고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거래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증진되었고 시장에서 공정한 가격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상업이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국가 재정으로 문화예술을 지원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부당한 영향력을 방지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예술기관 간의 신뢰 확보와 독립성 보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예술기관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문화예술 지원할 수 있도록 당사자가 독립적이고 동등한 위치가 되는 팔길이 계약을 예술기관의 재정지원 원칙으로 도입하였다.
예산편성과 집행의 독립성 없이 문화예술정책 독립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