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항일기념관 내부 전경
국가보훈부
일본이 제주 바다를 침탈하고 제주 어민들이 항쟁에 나서는 상황에서 항일투사로 부상한 인물 중 하나가 성산읍 출신인 고은삼(高殷三)이다. 1892년에 출생한 그는 청년기부터 민족주의운동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3·1운동 2년 뒤인 1921년, 29세인 그는 영주소비조합이라는 큰 단체를 발족시켰다. 1922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 8면 중간은 전년도 연말에 있은 이 일을 "제주도 유지 고은삼" 등이 "제주에 경제단체가 업슴을 개탄하고 소비자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영주소비조합을 발기"했다는 말로써 보도했다. 지역 유지들이 다수 참여한 이 조합에서 고은삼은 조합장으로 선출됐다. 개인적 역량에 더해, 조부 고계정이 제주에서 현감을 지낸 점도 이에 영향을 줬으리라 볼 수 있다.
3·1운동 얼마 뒤인 이 시기의 소비조합 결성은 한국 대중을 단결시키는 일이었다. 제주 지역에서 이런 활동이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는 점은 2021년에 <탐라문화> 제67호에 실린 신소연의 '제주 조천지역의 근대 민족운동 형태의 변화과정'이 1920년대 조천면 지역의 소년운동·여성운동·노동야학 등과 더불어 조천소비조합을 언급하면서 "일제 경찰들이 이들을 주시했다"고 기술한 데서도 확인된다.
고은삼은 1922년에는 정의교육기성회를 설립하고 성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성산초등학교)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이렇게, 지사(志士) 스타일의 민족운동가로 활동하던 그는 35세 때인 1927년에는 완전히 색다른 스타일로 뉴스의 초점에 서게 된다. 그해에 그는 일본 어업의 제주 침투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조직해냈다. 이런 저항으로 인해 발생한 두 민족 간의 '500 대 200'의 격투를 그가 지휘하게 됐다.
1927년 5월 16일,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인 정의면 고성마을에서 정의면중앙청년회가 주최하는 씨름대회가 열렸다. 나흘 뒤 <동아일보>는 성산 씨름대회로도 불리는 이 행사를 보도하는 기사의 제목을 '운동회장이 수라장으로 돌변'으로 달았다.
기사는 "그때 맛츰 동면(同面) 성산포에 뎡박 중이든 고등어배의 어부 이백 명(일본인 이십 명)이 상륙하야"라고 말한다. 한국인 선원이 훨씬 많지만 일본인들이 이끄는 고등어잡이 배에서 약 200명이 섬에 상륙했다.
씨름 경기장에 나타난 일본 측 선원들은 관람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위 기사는 그들이 "그 지방 사람과 씨름(각희)를" 하게 됐다고 말한다. 어업 문제로 인한 갈등 때문에 두 민족 간의 싸움이 잦았던 성산포 지역에서 일본 선박 선원들이 지역민들과 몸을 맞대고 시합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 선박 선원들의 행동은 점잖지 않았다. 차별적 발언과 강압적 태도로 대회 진행을 방해했다. 그러더니 심판 판정마저 수용하지 않고 무리하게 재시합을 요구했다. 심판이 재시합을 거절하자 일본 선박의 한국인 선원이 심판의 뺨을 때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한국인이 때린 뺨이지만 일본 선박 선원이 때린 뺨이었다. 일본 선박 사람들이 남의 지역 체육대회를 훼방하다가 급기야 심판까지 때리는 상황은, 일본이 제주 어장을 침범하고 한국 어민들을 억압하는 상황을 연상시켰다.
그 뺨이 신호탄이 되어 한국인들이 일본 선박 선원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지금은 이 사건의 한국 측 가담자들이 500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건 6개월 뒤에 나온 11월 14일자 <조선일보> 2면 중간은 한국 측이 1000명이었다고 보도했다. 500명이든 1000명이든, 그 뺨이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건이 확대된 데는 성산리청년회장 송세훈과 더불어 고은삼의 역할이 컸다. 두 사람은 세에 밀려 퇴각하는 일본 측을 추격할 것을 지시했다. 현지인들은 달아나거나 몸을 숨기는 일본 측을 추격하며 공격을 가했다.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상황이 커지자 지역 내의 일제 경찰은 물론이고 전남 지역의 일제 경찰도 출동했다. 집단 격투의 차원을 뛰어넘어 대규모 항일투쟁으로 급진전된 결과였다. 일본 측에서는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지만, 한국 측에서는 92명이 체포되고 52명이 목포경찰서로 넘겨졌다. 일제 경찰의 편파적 태도는 이 사건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한층 더 웅변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1932년 해녀항일운동과 추자어민투쟁 등으로 이어졌다. 다른 민족주의 운동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폭동으로 비지지 않고 항쟁으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은삼은 유죄선고를 받지 않았다. 일제 검찰은 징역형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증거불충분을 내세웠다. 그의 지시하에 공격을 가한 사람들 중에 1년 6월형을 받은 이들이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고은삼을 왜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는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제주 성산일출봉
연합뉴스
이는 법원이 사건을 단순 폭행으로 축소한 결과였다. 이 사건이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배후에서 공격을 지휘한 고은삼과 송세훈에게는 유죄를 선고하지 않는 편이 일본에 유리했다. 지사 스타일의 운동가인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사건의 민족주의적 특성을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실형을 살지 않은 것이 지역 내에서 고은삼의 위신을 떨어트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물러간 뒤에 그가 성산면장이 된 것을 보면 지역 내 영향력이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지역 유지가 사건 현장을 피하지 않고 일본 측에 대한 응징을 지휘한 것은 도리어 리더십을 높일 수 있는 요인이다.
일제 식민지배는 조선 땅의 사람들과 토지뿐 아니라 조선 바다의 어족자원에도 악영향을 줬다. 고은삼은 일제의 어족자원 침탈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와 저항을 1927년 성산포 사건으로 조직해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일제의 어업 침략을 명확히 거부했다는 증거를 남겼다.
고은삼의 투쟁은 제주도민들뿐 아니라 한국 어민들이 일제에 맞서도록 추동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그는 항일투사이고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국가보훈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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