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무위 나온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뉴라이트는 1919년 3월 1일이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인식되는 것뿐 아니라 1945년 8월 15일이 역사적인 날로 기념되는 것도 꺼린다. 이런 모습은 뉴라이트의 아이콘처럼 갑작스레 급부상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에게서도 나타났다.
지난달 26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는 1945년 광복을 인정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주한일본대사도 아니고 독립기념관장이 이런 대답을 했다. 유동수 민주당 의원의 거듭되는 질문에 그는 "관장 자격으로 지금 얘기를 하라면 코멘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개인 자격의 답변은 하지 않겠다고 답해야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독립기념관장 자격으로는 1945년 광복이 맞는지 아닌지를 답변할 수 없다고 답했다. 1945년 광복의 의미를 공식 석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해야 할 독립기념관장이 그처럼 해괴한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뉴라이트의 대표적 인물인 이영훈 당시 서울대 교수는 2006년 7월 31일 자 <동아일보>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에서 "나에게 1945년의 광복과 1948년의 제헌, 둘 중에 어느 쪽이 중요한가라고 물으면 단연코 후자이다"라며 다소 유화적으로 1945년 8·15의 의미를 떨어트렸다. 그런데 김형석 관장은 노골적으로 1945년 8·15을 탐탁치 않아하고 있다. 그만큼 뉴라이트 세력이 솔직해지거나 다급해진 것은 아닐까?
뉴라이트에겐 부담스러운 1945년 광복
1919년 3월 1일의 선악 구도는 '한국민중은 선, 일본제국주의는 악'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한국민중 대 일제'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의 뉴라이트와 이념적으로 맞닿는 세력은 이 시기에 일제와 한편이었다.
그 세력의 구심점인 이완용은 1919년 4월 5일·9일 및 5월 29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문을 실어 "이 좁은 땅으로, 이 수준 낮은 백성으로 무슨 독립이냐?", "총독정치 덕분에 조선 인민의 복지는 향상됐다", "하느님도 조선과 일본이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총독부에 요구할 게 있더라도 여러분의 생활 및 지식 수준이 향상된 뒤에 요구하라" 등의 망언을 했다.
지금의 뉴라이트가 내세우는 논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말들이 이완용에게서 나왔다. 이는 뉴라이트의 이념적 뿌리가 일제 및 친일세력과 맞닿아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뉴라이트 입장에서는 '한국민중 대 일제'의 구도를 띤 1919년 3·1운동과 그 결과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어떻게든 부정할 수밖에 없다.
1945년 8월 15일의 경우에는 한국 민중 대 일제의 구도가 상대적으로 옅은 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미국 대 일본'의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이 이 땅을 한국인들에게 되돌려줄 필요성은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미군정이 3년 만에라도 끝난 것은 독립운동으로 표출된 한국인들의 에너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구왕국이 관리하던 오키나와는 조선보다 빠른 1879년에 일본 식민지가 됐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지금까지도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이라고 해서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 독립운동만큼의 강렬한 저항이 나오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항일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할 중국·러시아 같은 인접국이 섬나라 오키나와에 없었던 점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유관순보다도 훨씬 어린 민중들이 일제 헌병의 총칼을 무릅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쳐 1919년에 이미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유흥과 쾌락에 높은 가치를 두고 살았던 31세 청년 이봉창이 뒤늦게 제국주의 모순에 눈떠 바짓가랑이에 수류탄을 숨긴 채 일본에 들어가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일은 아시아인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한국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소작쟁의 및 노동쟁의를 통해 시도 때도 없이 일제에 저항하는 일은 온 세계가 다 알고 있었다. 이런 민족에게 땅을 되돌려주지 않았다가 어떤 불상사를 당할 것인가는 해방 직후의 미군정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45년 8·15 광복은 미·소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점령했다가 1972년에 도로 일본에 돌려줬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1945년 8·15 승리의 주역에는 한국인들도 당연히 포함되지만, 친일파들이 장악한 해방 이후의 역사교육에서는 이 점이 제대로 강조되기 힘들었다. '8·15 해방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는 말을 선뜻 꺼내기 힘든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1945년 8·15와 관련해서는 '한국 민중 대 일제'의 이미지가 상당히 옅어지게 됐다.
그렇지만 이 상태만으로도 뉴라이트에게는 부담이 된다. 일제'라는 행위자가 1945년 구도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다. '미국 대 일제'로 훨씬 많이 인식되는 1945년 구도는 일제가 전쟁범죄 세력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친일세력과 이념적으로 맞닿는 뉴라이트에게 짐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1948년 8월 15일을 강조하는 이유
▲ 1948. 8. 15.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정부 수립 경축식
ⓒ NARA
대규모 전쟁의 승패가 갈린 시점을 기념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유럽 국가들은 독일이 항복한 1945년 5월 8일과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을 전승기념일로 인식한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1945년 9월 2일을 더 중시해 이날을 대일 전승기념일로 기억한다. 이런 기념은 패전국 일본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일본은 종전일이라는 다소 모호한 용어로 1945년 8·15를 기리고 있다.
8·15 해방이 누구 덕분인가를 가리지 않더라도 한국인들이 일본의 항복일을 기념하는 것은 당연하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날만큼 역사적인 날도 없으므로 1945년 8·15에 의미를 두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뉴라이트들은 1919년 3·1에 이어 1945년 8·15마저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만들려 애쓰고 있다.
그들이 한국인들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1948년 8월 15일은 일본제국주의의 이미지가 현저히 약한 날이다. 이날은 분단정부가 수립된 날이라 '한국 민중 대 일제'나 '미국 대 일제'의 이미지를 별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뉴라이트가 건국절이라는 이름을 붙여 1948년 8·15를 강조하는 것은 이날이 일제보다는 북한과 많이 관련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남북 대립과 연관시켜 한반도 냉전을 정당화하려는 의중도 그 속에 깔려 있다.
뉴라이트들은 한국인들의 관심을 1919년 3월 1일은 물론이고 1945년 8월 15일과도 떼어놓으려 한다. 대신, 남북 갈등과 연결되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각인시키려 한다. 북한과는 관련성이 크고 일본과는 연관성이 적은 날을 대한민국의 '1일'로 만들려고 하는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처럼 뉴라이트가 1919년뿐 아니라 1945년의 의미까지 퇴색시키려 하는 동기 중 하나는 일본과 무관한 날을 골라내려는 이 그룹의 이념적 경향과 관련이 있다.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합리화한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