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있다.
남소연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의 지론은 한국인들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었다는 것이다. 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그는 이재강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부터 "김문수 장관은 일제 치하에서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말했다"라는 지적을 받았다.
김 장관은 "의원님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면 어디 국적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런 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럼 손기정 선수도 잘못된 것인가?"라고 발언했다.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것은 일본 국적이 아니면 국적을 가질 수 없었던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냐고 되받아친 것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싸한 말이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였으므로 한국인은 일본 국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김문수 장관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 선조들은 일본인이었다'는 자신 있게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적법 한국에 적용하지 않은 일제
일본은 한국인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한 1910년 이후에도 한국인의 국적을 명확히 정리하지 않았다.
1910년 8월 22일에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가 서명한 한일병합조약 제1조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고 함으로써 한국인에 대한 관할권을 일본에 넘겼다.
대한제국 국민의 국적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말은 없었다. 모든 통치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간접적 표현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해 대만을 차지할 때는 달랐다. 1895년 4월 17일 체결된 청일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마관조약·하관조약) 제5조는 향후 조약이 발효되고 2년 내에 대만을 떠나지 않는 대만인은 "일본국의 편의에 따라 일본 국민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때는 국적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뤘던 것이다.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에서 국적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은 이유와 관련된 문건이 있다. 일본의 식민지 법률정책에 관여한 야마다 사부로 도쿄제국대 교수가 병합조약 1개월 전인 1910년 7월 15일 데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한 '합병 후 한국인의 국적 문제'라는 의견서가 그것이다. 작년에 <일본 비평> 제29호에 실린 엔도 마사타카 와세다대학 연구원의 논문 '호적을 통해서 본 국적: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야마다의 의견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과거 한국 신민(臣民)인 자는 합병에 따라 일본국적 취득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이 일본인과 완전히 동일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외국에 대항해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본 이외의 국가로부터 일본인 취급을 받도록 만들기 위해 한국인을 일본 국민으로 인정하는 것일 뿐,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는 의견서다. 병합조약에서 국적 문제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격에 두지 않으려는 인식과 무관치 않다는 판단을 가능케 하는 자료다.
일본은 한국을 강점해 놓고도 한국인을 자국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일에서만큼은 소극적이었다. 국적법을 한국에 적용하지 않은 사실에서도 그 점이 드러난다.
2014년에 <공법학연구> 제15권 제2호에 실린 최경옥 영산대 교수의 논문 '일본 국적법의 체계와 운용'은 "국적법이 그 당시 식민지에도 적용"됐다면서 "1899년(명치 32년) 칙령 28호에 의하여 대만에 적용되었으며, 1924년 4월 16일의 칙령 제88호에 의하여 사할린에 시행"됐다고 한 뒤 "조선에는 시행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강점한 대만과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뒤 강점한 사할린에는 국적법을 시행하면서도 한국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국적법 제20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제20조는 외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본 국민은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는 조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