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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기치 못한 기후변동에 농업이 흔들리고 있다. 지속된 가뭄에 말라 죽은 옥수수 ⓒ 셔터스톡
사람들은 거리를 지나가다 인상적인 건축물이 눈에 띄면 언제 지어진 것인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여행하며 창밖에 스쳐 가는 산을 보면 그 산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절대 궁금해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세운 건축물과 달리 산은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거기에 그대로 있었고, 아마도 앞으로 수 세기 뒤에도 그대로 있게 될 '배경'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의 역사적 시간대에서 만들어진 건축물과 지질학적 시간대를 따라 형성된 자연물을 완전히 다르게 간주해 왔다.
하지만 이제 오늘 목격한 산과 바다, 기후와 계절, 들판과 야생들이 내년에도 우리 삶의 배경처럼 한결같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 들어왔다.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손에 쥐고 무한 경제성장을 계속하여 놀라운 산업문명을 이뤄냈지만, 그사이 우리는 강력한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어 수만 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하는 지구의 탄소 순환 시스템을 교란해 버렸다.
그 결과 인간의 역사적 시간대가 이제 생물학적 시간대, 지질학적 시간대와 서로 얽히는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인도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이를 "인간의 역사와 자연사 사이의 벽이 뚫리는" 시대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인류세(人類世)'라고 부른다. 지난 8월 부산에서 열렸던 2024 세계지질과학총회(IGC)에서 '인류세'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승인되리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수개월 전 실무소위에서 아쉽게 부결된 바가 있다.
하지만 지질학자들이 대부분 인류세를 좁고 기술적인 문제로 엄격히 정의하려다 보니 부결되었던 측면이 있을 뿐, 인류세 제안에 반대하는 학자들 가운데 기후변화를 포함한 인간의 영향이 지구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세계지질과학연맹도 "지질연대표의 공식 단위로서 인류세 승인이 거부되기는 했지만, 인류세는 지구과학 및 환경과학자뿐 아니라 사회과학자, 정치가, 경제학자, 일반 대중이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인정했다.
시대에 따라 태도 바꾼 경제학자들
▲ 화석연료를 등에 업은 산업 성장은 자연이라는 배경을 뒤흔들었다. 울산의 한 정유공장 ⓒ 셔터스톡
그러면 인류세의 도래가 우리의 물질적 삶과 경제 제도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더 이상 자연이라는 고정된 배경을 뒤로 하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연은 경제활동을 위한 에너지와 원료를 끝없이 제공해주는 '마르지 않는 원료창고'이자 경제활동의 결과 폐기되는 쓰레기와 폐열을 언제까지나 받아줄 '무한한 폐기물 창고'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인류세의 도래로 이런 기대는 오류로 판명 났다. 화석연료를 등에 업은 거대한 산업 성장은 자연이라는 배경을 뒤흔들었고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뒤섞이기 시작했다. 인간 경제활동의 지속성을 담보해 주던 자연이라는 배경에 급격한 변화가 초래된 결과,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는 수십 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바뀌었고 생물다양성 수준은 급격히 떨어졌으며, 해양 산성화와 토양 오염 등이 심각해졌다.
이렇게 자연이라는 배경이 변하자마자 그 위에서 작동했던 농업은 예기치 못한 기후변동에 흔들리게 되었고 도시는 기후재난에 취약하게 되는 등 경제활동도 강력한 변화를 요구받게 되었다.
인류세 시대의 경제활동은 이제 무한성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지구 생태계의 수용능력 범위'라는 절대적 제약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을 시장경제에 투입되는 생산요소들의 집합소 정도로 저평가하던 과거의 관행을 버리고, 인류가 살아갈 터전이며 기반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지구는 물질적 생산을 위한 원료창고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인류의 물질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존립을 위한 근본 전제로 지구와 자연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 전문가들은 여전히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성장의 한계> 공저자 데니스 메도즈는 시대에 따라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성장과 자연에 대한 태도를 바꿔왔는지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구 생태계의 한계는 없다.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무시했다. 그러더니 1980년대에는 "한계는 있지만 아주 멀리 있다. 그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바꿨다.
1990년대가 되자 "한계가 어쩌면 가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시장과 기술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또다시 말을 바꿨다. 마침내 21세기에 들어서자, 기후와 생태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경제성장을 더해야 한다고 자신들의 관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제 모두 인류세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과거 경제 관행도 인류세의 변화한 여건에 맞춰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 그것이 기후를 위하는 길이자 우리의 삶과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 김병권 /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위원 ⓒ 김병권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병권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위원은 <기후를 위한 경제학>의 저자입니다. 2019~2022년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장을 맡으면서 정의당의 기후정책과 디지털경제 정책 설계를 책임졌습니다. (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서울시 혁신센터장과 협치자문관을 지냈습니다. 학부에서는 화학을 공부했지만 석사는 경제학, 박사는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1.5도 이코노믹스타일>, <기후위기와 불평등에 맞선 그린뉴딜>, <사회적 상속:세습사회를 뛰어넘는 더 공정한 계획>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