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07 20:09최종 업데이트 24.09.0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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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하의 좌우대립에서 우파는 주로 친일보수세력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보수 성향을 갖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독립운동을 했지만 이북 정권이 싫어 월남한 사람들도 친일보수세력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북 출신 김성주도 그런 부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기술된 백과사전도 있다. 이런 이야기가 언론보도에도 나온다. 가족사진과 함께 실린 특집 기사인 1991년 3월 29일 자 <한겨레>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63: 김성주' 편은 "해방 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제헌 의원을 지낸 김인식 씨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증언한다"고 이 기사는 덧붙인다.

이승만을 무시한 김성주

1991년 3월 29일 자 <한겨레>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63: 김성주’ 편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3·1운동의 해인 1919년을 전후해 평안북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성주는 해방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다음, 미군정을 돕는 극우 청년운동에 가세했다. 미군정은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인 이남 좌파진영의 영향력에 부담을 느꼈다. 그런 미군정이 이북 출신 청년들을 행동대원으로 영입할 때 그도 가담했던 것이다.

그는 평안청년회 창립을 공동으로 주도했다. 훗날 이승만 정권하에서 내무부 치안국장과 교통부장관 등을 지내게 될 문봉제(1915~2004)와 함께 이 단체를 만들었다. 창립대회 사흘 전에 발행된 1946년 5월 4일 자 <대동신문> 2면 우상단은 "평안남북도를 기반으로 한 청년동지 8백 명의 결합체로 평안청년회를 결성"하게 됐다고 전했다. 김성주와 문봉제가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지지 세력의 규모가 그 정도 됐던 듯하다.

평안청년회는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죽음으로 유명한 '대구 10월 항쟁'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더 막강한 극우세력을 만들지 않으면 좌파를 막아내기 힘들었던 당시 상황에서 그는 이북 청년단체들을 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로 결집하는 일에 참여한다.

2014년에 <숭실사학> 제33집에 실린 윤정란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원의 논문 '서북청년회 출신들의 정치적 배제와 부활'은 서북청년회의 결성 배경 중 하나와 관련해 "10월 1일 대구인민항쟁이 일어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반공세력의 결집이 시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결성됐고, 김성주는 부위원장단에 들어갔다. 이남의 친일보수진영이 좌파 독립운동진영을 독자적으로 상대하기 힘들던 시절에 극우 행동대원이 된 그는 미군정을 돕고 뒤이어 이승만을 도우며 이남 사회에서 기반을 굳혀 나갔다.

그는 이승만 정권 핵심부와 관련을 맺었다. 이승만의 수족으로 지칭될 정도였다. 백범 김구 암살(1949.6.26.)의 모의에도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다. 위 <한겨레>는 송남헌 등의 <전환기의 내막>을 근거로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김창룡 소령,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위원장 등의 8·8구락부에서 김구 암살 모의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언급한다.

김성주가 백범 암살의 전모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난 1960년에 크게 회자됐다. 그해 8월 11일 자 <동아일보> 3면 우상단은 '고 백범 김구씨 암살사건 진상규명투쟁위원회' 대표 함종현이 전날 서울지검에서 진술한 내용을 근거로 "함씨의 말에 의하면 김성주와 안두희는 같은 고향 출신이며 서북청년회원이고 안두희가 체포된 후 김은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데모까지 주도"했다고 보도했다.

그 정도로 이승만 정권에 깊이 밀착했던 그는 한국전쟁 얼마 전에 정권과 멀어졌다.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단체들을 1948년 12월 19일에 통합한 대한청년단 내부의 권력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됐다.

그런 그에게 재도약의 발판이 된 것이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이다. 1960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3면 우상단은 "6·25 당시 수천 명 의용부대를 조직하여 북한 괴뢰군과 혈전까지" 했다고 말한다. 또, 북진하는 유엔군을 따라 평양에 들어가 청년 조직을 결성했고, 유엔군에 의해 평안남도도지사 대리로 임명됐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문봉제를 도지사로 임명했다. 김성주는 이 인사조치를 거부하며 문봉제를 서울로 돌려보냈다. 왕조시대로 치면 역모에 해당하는 일이다. 거기다가 38선 이북을 별도의 군정이 관리하도록 하자는 주장까지 펼쳤다. 이승만의 권한을 제한하자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함경남도 출신의 검찰총장(재임 1952~1955)인 한격만은 1973년 4월 5일자 <경향신문> '내가 겪은 20세기'에서 "일부 야심가들은 수복된 38선 이북은 군정을 실시하여야 하며 대한민국 주권은 38선 이북에 미치지 못하게 하자고 주장했어요"라고 한 뒤, 그런 이유 때문에 김성주가 이승만의 평양 방문(1950.10.30) 때 대통령 연설회장에도 나타나지 않고 이승만을 냉대했다고 말한다.

이승만을 막 대하는 김성주의 행보는 그 뒤로도 계속됐다. 한국전쟁 중에 치러진 1952년 대선 때는 독립운동가 출신인 조봉암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이승만이 미국을 무시하는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1953.6.18)을 단행해 휴전협상을 훼방했을 때도 이승만을 비판했다.

재판 없이 '그냥 죽일 것'... 이승만의 명령

이승만 ⓒ 위키미디어 공용


결국 그는 정권의 보복을 받는다. 얼마 안 있어 헌병대에 체포된다. 정권은 국가변란집단구성죄와 대통령 살인예비죄 등을 뒤집어씌워 재판에 넘겼다. 1973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67)'은 김구 암살 음모를 훤히 아는 그가 안두희와의 관계가 틀어진 뒤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안두희가 김성주 처리를 정권에 건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군사재판이 막바지에 다다른 1954년 4월, 그에게 징역 7년이 구형됐다. 이승만은 형량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헌병사령관 원용덕에게 '그냥 죽일 것'을 지시했다.

위 <한겨레>에 따르면, 4·19 뒤에 원용덕 집에서 이승만의 영문 밀서가 발견됐다. "김성주는 내가 임명한 문봉제를 해치려는 자이며 손원일 국방장관에게도 말했으니 극형에 처하라"라며 "너는 잔말 말고 즉시 내 명령대로 처단하라"는 내용이었다. 법원이 아닌 대통령이 한글이 아닌 영문으로 은밀히 극형을 선고하는 밀서였던 것이다.

'사형집행'은 법원 선고를 사흘 앞둔 1954년 4월 16일 집행됐다. 집행 장소는 원용덕의 신당동 자택이었다. 1960년 8월 3일 자 <경향신문> 3면 우상단은 원용덕이 부관인 김진호 중령, 운전사인 임정수 상사 등에게 처형을 지시한 일을 설명하면서 "육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김씨를 끌어내다 자기 집(신당동 369)에서 살해한 후 화장하였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사형판결을 받은 것처럼 군법회의 등 관계 기록을 조작"했다고 보도했다. 임정수 상사가 등 뒤에서 총을 쏜 뒤 바로 옆의 방공호에 묻는 방식으로 '사형집행'이 이뤄졌다.

김성주는 해방 뒤 월남해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범죄를 돕는 서북청년단을 주도하며 해방정국 하의 극우 테러를 주도했다. 그러다가 이승만 정권과 사이가 틀어져 이승만의 은밀한 사형선고를 받고 신당동 헌병사령관 집에서 처형됐다.

1950년대 한국인들이 목격한 것은 이승만이 세우고자 했다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 이승만이 자기 수하까지도 잔혹하게 살해하는 폭정의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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