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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9일 오후 2시 31분]
▲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 무대에 올라 대선 후보직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이날 해리스 부통령은 "위대한 역사의 다음 장을 열자"고 말했다. ⓒ 연합뉴스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해리스가 평생 본인을 인도 사람이라 칭하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흑인이라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의 발언이 내포한 여러 윤리적, 정치적 부적절함을 차치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냐하면 카멀라 해리스는 평생 동안 대중에게 흑인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임을 포기하고 해리스 부통령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부상하자 해리스의 인종 정체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녀는 과연 흑인인가 아니면 아시아인인가? 이 문제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먼저 그녀의 흑인 정체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멀라 해리스의 아버지는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 남성이다. 부모 중 한 명이 흑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미국에서 흑인으로 여겨진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를 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불리는 것도 그 예다. 이러한 레이블이 과연 정당한지 여부는 논외로 하자. 왜냐하면 미국에서 '인종 담론'은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인 영역이 아닌, 매일 체감되는 현실에 기반한 언어로 표현되고 통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카멀라 해리스의 '흑인' 정체성은 오바마 전 대통령의 '흑인' 정체성과 유사한 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노예제와 민권운동을 통해 형성된 미국의 전통적 흑인 역사와는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케냐 출신의 아프리카인이었고 해리스의 아버지는 자메이카 출신의 카리브해 흑인이었기에 엄밀히 말해 그들은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 American) 전통의 흑인은 아니다. 이러한 배경을 근거로,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흑인' 정체성을 폄하하기도 한다. 200년이 넘는 탄압과 차별의 역사를 겪은 미국 전통적 흑인의 DNA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국 내 인종 담론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미국은 매우 '인종화'된 사회로, 여전히 피부색이 개인의 소속감과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정치에서 미미했던 아시아계 존재감
▲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20일(현지시간) 일리노이주 시카고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둘째 날 행사에서 무대에 올라 포옹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 차례로 한 연설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 연합뉴스
자아를 인식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아프리카에서 막 유학 온 흑인이든, 카리브해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흑인이든, 아니면 미국에서 태어난 '전통적' 흑인이든, 이들은 모두 미국의 고질적인 편견과 제도적 차별에 노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출신이 다르더라도 이들은 소수민족으로 오랜 기간 내재된 평등과 정의를 향한 집단적 목표의식과 책임감을 공유하게 된다.
해리스의 경우 카리브해 출신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자신을 미국의 전통적 흑인과 동일시한 증거는 많다. 그녀는 역사적 흑인 대학교인 하워드대학교에 진학했다. 흑인들의 평등한 교육을 위해 설립된 하워드대는 흑인 평등, 공정한 기회, 민권 등을 촉진하는 데 큰 기여를 해왔다. 해리스가 하워드대를 선택한 것은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UC 헤이스팅스(UC Hastings) 법대에서 '흑인 법대생' 클럽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검사장과 법무장관 시절에는 특히 흑인들이 취약한 형사 사법 개혁과 경찰의 인종적 편견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렇게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장,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 미국 상원의원, 미국 부통령 등 모든 직책에서 '첫 번째 흑인'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는 파장을 일으켰다. 이처럼 그녀의 흑인 정체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그녀의 아시아인 정체성을 살펴보자.
카멀라 해리스의 어머니는 인도 남부 첸나이 출신이다. 19살에 미국으로 유학 와 버클리대학에서 영양학 박사 과정을 밟던 중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해리스를 낳았다. 해리스는 7살 때 부모가 이혼한 이후 실질적으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작년 백악관에서 열린 '아시아계 미국인 및 하와이 원주민·태평양 섬 주민(AANHPI)' 포럼에 주요 연사로 등장한 해리스는 유년 시절 외가를 방문하기 위해 수차례 인도를 다녀오고 외가의 가족사를 배우며 인도 타밀어와 문화를 접했던 경험이 다양한 문화 속에서 공통적 인간애를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카멀라 해리스의 '아시아인' 정체성이 최근까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아시아인 정체성이 대중에게 공론화되기 시작한 시점이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부와 지위, 연대력과 정치적 조직력이 부각되는 시기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미국 정치에서 아시아계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미국 인구의 6%를 갓 넘는 적은 인구와 통계적으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는 인종 집단이었기 때문에 아시아계를 유의미한 유권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2020년을 기점으로 아시아계 공동체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아시아인 혐오범죄의 증가가 그 변화를 촉발했다.
코로나 팬데믹은 미국 내 아시아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바이러스"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대중의 두려움과 혐오를 부추겼고, 이로 인해 많은 아시아인이 혐오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비영리단체 스톱 AAPI 헤이트(Stop AAPI Hate)의 보고서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 동안 수만 건의 폭력과 차별 사례가 집계되었으며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아시아 혐오범죄 기억 아직 생생
▲ 2021년 3월 19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연쇄 총격사건 현장 중 한 곳인 스파업체 '골드스파' 앞에서 한인들이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애틀랜타 일대에서는 21세의 백인 로버트 에런 롱이 마사지숍과 스파 등 3곳을 돌며 총격을 가해 한인 여성 4명을 포함해 아시아계 6명 등 8명이 숨졌다. ⓒ 연합뉴스
팬데믹 전까지만 해도 사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자신을 '아시아인'이라는 넓은 범주 속에서 인식하기보다는 개별적인 민족, 예를 들어 한인계 미국인, 필리핀계 미국인, 인도계 미국인 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그러나 아시아인 혐오범죄를 겪으며 각 아시아인 커뮤니티는 의식적으로 연대와 협력을 통해 미국 내 리더십과 정치적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그렇게 아시아계는 2020년 대선에서 역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고, 가장 중요한 경합지인 조지아주에서는 선거 결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사회 각계각층의 영향력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아시아계를 지원하는 자선기관과 권리단체를 설립하는 동시에 더 많은 아시아계의 정계 진출을 이끌기도 했다. 2022년 중간선거에서 아시아계는 435개의 연방 하원 지역구 중 역대 최고인 18개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한 마디로 반아시아 정서의 증가로 인해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집단적 정체성이 더 견고해지고 강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큰 그림과 구체적 맥락 속에서 카멀라 해리스의 아시아인 정체성에 대한 담론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해리스는 자신의 '아시아인' 정체성이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아시아계는 더 이상 미국에서 변두리 유권자가 아니라 미국 인종 구성의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집단으로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 담론에 있어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다양한 아시아 국가들의 고유한 문화와 독특한 개성을 하나의 '아시아인' 범주로 묶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특히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미국에서 남아시아로 표현되는 문화권과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계 미국인들 간에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문화적 정체성'과 '정치적 연대'는 별개의 영역이며 둘 다 동시에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전통과 문화, 언어를 존중하고 유지하려는 노력과 타아시아계가 직면한 불의와 위협에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하는 행위는 양립 가능하다.
또 다른 이들은 '정체성 정치'에 얽매이는 위험을 경고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성과 합리에 기반하여 세계관을 구축해야 하며 인종, 성별, 종교 등 집단적 정체성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 역사에서 인종적 이유로 자행된 여러 '원죄'의 어두운 기록은 너무나 분명하다. 미국 원주민, 흑인, 유대인, 히스패닉, 중동계, 그리고 아시아계 등 수많은 이들이 단지 그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로 차별과 혐오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체성 정치'는 때로 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정당한, 혹은 불가피한 권리 투쟁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이 그랬듯이 카멀라 해리스도 자신의 정체성 카드를 선별적이고 전략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아시안 혈통과 흑인 유산을 자랑스럽게 기리면서도, 모든 미국인들을위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욱 효과적이고 유리하기때문이다.
그럼에도 해리스의 부상은 미국 내에서 다양성(Diversity)과 대변성(Representation)이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음을 반증한다. 특히 이는 지난 9년간 우파 정체성 정치를 통해 백인 기독교 남성 중심의 권력을 구축한 트럼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기에 더 그렇다.
과연 미국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범아시아계를 대표하는 흑인-아시아계 혼혈 여성 대통령인 해리스를 선택할까, 아니면 트럼프의 재선을 선택할까. 11월 5일 미국 대선이 더욱 주목되는 이유다.
▲ 전후석 재미 영화감독 ⓒ 전후석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전후석은 뉴욕에 거주하는 재미 한인 영화감독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와 <초선>을 연출했고 <당신의 수식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 세 창작물 모두 재외동포들의 이야기와 디아스포라적 사유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러가 되기 전에는 뉴욕 변호사로도 활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