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의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김삼룡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에 충북 충주군 엄정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늘날의 엄정초등학교가 그의 모교다. 당시에는 4년제 용산리보통학교였다. 그는 이곳을 1928년에 졸업하기 전부터 항일투쟁에 열렬히 참여했다.
김일성의 활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인 <불멸의 력사>를 해설한 <총서 불멸의 력사 용어사전>에 따르면, 1996년 평양에서 발행된 <조선대백과사전> 제4권은 김삼룡이 초등학교 시절인 10대 중반부터 '적들'에게 대항했다고 기술한다.
"1926년 6·10만세 반일시위투쟁 때 동맹휴학에 참가하였으며, 1934년에는 서울 등지에서 반일투쟁에 참가하였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2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석방 후 반일 지하투쟁에 계속 참가하다가 1940년에 적들에게 또다시 체포되어 10년 징역을 받고 감옥에 있었다."
위 사전에는 1934년과 1940년에 투옥된 사실만 설명됐지만,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동대문 밖의 고학생 자활단체인 고학당에 입학한 뒤인 1930년에도 "적들"에게 구속된 일이 있다. 이때는 독서회를 조직한 혐의로 붙들려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학교에 있을 때는 동맹휴학에도 참여하고 독서회도 조직하는 방법으로 항일투쟁을 벌인 그는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뒤에는 현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의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경성전기·대창직물·경성방직·용산철도공작소·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자들이 일제 착취로부터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일을 함께했다.
그가 벌인 투쟁은 일본 재벌자본가들의 이윤 증대를 위한 식민지배로부터 한국 노동자들을 구해내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일본 재벌들이 두려워하는 공산주의 항일운동가의 외형을 갖췄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강조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전체주의를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김삼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할 만한 지적이다.
그가 참여한 독립운동 중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1929년 대공황을 계기로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치달은 일제에 맞서 경성콤그룹(경성콤무니스트그룹) 결성에 참여한 일이다. 경성콤그룹의 목표가 바로 전체주의 일본에 대한 반파시즘 투쟁이었다.
김삼룡이 독립운동가 이관술 등과 함께 이 그룹을 결성한 시점은 1939년이다. 일제가 한국 대중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고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친일파로 한창 회유하던 때였다. 이로 인해 국내 항일투쟁이 크게 위축됐을 때 경성콤그룹을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경성콤그룹은 일제 막판의 대표적인 항일 조직 중 하나였다. 이 그룹은 일제의 발악이 극도에 도달한 시점에 등장했다. 또 김삼룡 같은 지도부가 체포된 뒤에도 소그룹 형태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조직은 일제강점기 막판의 국내 항일 진영에 정신적인 힘이 됐다.
2004년에 <한국사 연구> 제126호에 실린 이애숙 한국외대 강사의 논문 '일제 말기 반파시즘 인민전선론 –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는 1949년에 나온 장복성의 <조선공산당 파쟁사>를 인용해 "파시즘기 운동이 퇴조하던 상황에서 끝까지 운동을 청산하지 않은 사람을 운동선상에 총궐기"시키는 역할을 이 그룹이 했다고 설명한다. 항일운동권에 남은 사람들이 투쟁 의욕을 잃지 않고 끝까지 궐기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경성콤그룹이 했다는 평가다.
'남로당 총책'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