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6일, 익산 기찻길옆골목책방에서 진행한 <박범신 작가와의 대화>
윤찬영
"나의 문학적 자궁은 여기서 멀지 않은 강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를 작가로 키운 곳은 익산이다. 익산은 나의 문학적 고향이라는 마음을 늘 갖고 있다."
올해로 등단 50년을 넘긴 박범신 작가의 말이다. 그는 옛 익산군 황화면 봉동리(1963년 충남으로 편입)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외아들을 멀리 강경중학교로 유학 보냈고,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이라곤 본 적 없던 그는 학교에 도서관이 생기면서 처음으로 책다운 책을 펼칠 수 있었다. 매일 왕복 18km에 달하는 등굣길을 하루 4시간씩 오가야 했던 시절, 졸음을 참아가며 처음 빌려온 책을 몇 장 넘기던 그는 "너무나 강력하게" 그 책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잠이 싹 달아나고, 책을 끝까지 그대로 앉은 자세로 읽었다. 책의 마지막을 다 넘길 때는 책장이 눈물로 다 젖어 있었다. 책 한 권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 경험은 다시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어쩌면 작가로서의 그의 삶은 그날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익산 남성고등학교로 진학한다. 멀리서도 기차를 타고 수재들이 모여들던 학교였다. 그도 날마다 기차를 타고 강경과 이리를 오갔다. 그래서인지 작가 자신의 성장기로 읽히는 소설 <더러운 책상>엔 기차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강경에서 이리까지는 통학기차로 오십여 분 거리이다.
그는 새벽 여섯시 사십오분 기차를 타고서 고등학교가 있는 이리로 떠나고, 이리에서 오후 다섯시 반에 출발하는 통학기차로 돌아온다. 통학하는 학생들에게 이용할 권리가 보장된 기차는 이 두 편뿐이다. 그것은 일반 객차와 다르다. 통학기차는 화물칸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 일반 객차보다 작고 새카맣다... (중략) 기차는 그러므로 마치 철제 감옥 같다."
- 박범신 <더러운 책상> 중
그 무렵 해마다 12월이면 이 도시의 모든 학교 문학반 학생들이 다 같이 예식장을 빌려 '문학의 밤' 행사를 열곤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익산에 머물던 그 시절, 신동엽, 김수영, 고은 등 내로라하는 시인들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고 한다. 그는 "그만큼 익산은 문학의 전통이 굉장히 강했고, 익산하면 그냥 문학의 도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전국적으로 문인들이 그렇게 많이 살던 데가 없었다. 문학은 익산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1년에 한 번씩 앞자리에 쭉 앉아서 지켜봤다. 매우 문학적인 도시에서 성장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가난했던 집안 형편 탓에 교육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지만 끝내 문학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남들보다 조금 늦게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했다. 그리고 졸업 이듬해인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여름의 잔해>란 작품으로 당선됐다. "쓸쓸했다"던 그의 짧았던 대학 시절은 그렇게 저물었다.
"학교 뒤에 초가집 몇 채, 막걸리집이 전부였다. 이른바 대학가였다. 막걸리 마시고 토하고 울고... 지금 생각하면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아마 많은 학생들이 거기에서 인생의 깊은 맛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환경이 부럽지는 않다. 매우 문학적인 기억들이다."
안도현 "내 시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