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의 전설’ 박미옥현재 제주살이 8년 차로, 구좌읍의 한 마을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퇴직 후 삶’을 일궈가고 있다.
황의봉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형사,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 최초의 여성 마약범죄수사팀장, 강남경찰서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 '최초'의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여형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왔던 박미옥 형사. 탈옥수 신창원의 검거에 한몫을 한 것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경북 영덕 출신으로 33년이 넘는 경찰 생활 중 형사로만 30여 년을 일한 그는 2021년 서귀포경찰서 형사과장을 끝으로 명예퇴직 했다. 현재 제주살이 8년 차로, 구좌읍의 한 마을에서 후배 여형사와 한 마당에 각자의 집을 짓고 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눈다. 지난해에는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풀어낸 책 <형사 박미옥>을 출간했다. 1년 만에 8쇄를 찍었을 정도로 독자들의 반향이 컸다.
'여경의 전설'로 일컬어지기도 했던 형사 박미옥을 이웃들은 '박 반장'으로 부른다. 여성 강력반장의 이미지가 그만큼 강렬하게 각인됐기 때문일 것이다. <형사 박미옥>을 읽으면서 그가 살인범, 탈주범을 검거하는 강력하고 유능한 형사였으나 한편으로는 감수성이 뛰어나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몸에 밴 휴머니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사 박미옥, 형사 그 후
제주에 둥지를 튼 '박 반장'의 '형사 그 후'가 궁금해졌다. 그가 맞닥뜨렸던 강력사건에 얽힌 많은 사연은 오늘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로 되새겨볼 수 있을까. 작가로, 강연자로, 때로는 상담자로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도 경청할 가치가 있을 성싶다.
박 반장이 '두 번째 인생의 놀이터'로 마당 한쪽에 지었다는 서재에 마주 앉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가 책에서 토로한 사건들의 맥락을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을 첫 번째 화제로 떠올렸다.
그는 당시 서울청 화재감식팀장이었다. 현장에 긴급출동해 밤새 숭례문이 타는 현장을 지켰다. 양녕대군이 쓴 현판이 불에 탔고, 새벽녘엔 2층이 붕괴했다. "화재 원인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향후 복원 순서를 유념해야겠다는 생각을 꼭 붙들고 있었다"는 박 반장은 대목장을 비롯한 문화재 복원전문가들을 긴급 수배해 '복원 가능한 감식'을 진행했다. 당시 상황을 다룬 글의 제목은 '형사, 감성으로 했습니다'였다. 형사와 감성,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두 단어를 쓴 배경부터 들어보자.
"불이 난 이유도 중요하지만, 불이 난 이후는 더욱 중요합니다. 화재감식이 끝나고 복원전문가들이 왔을 때 훼손된 게 많거나 순서가 뒤엉켜 있거나 잔해들이 개념 없이 쌓여 있으면 복원에 엄청난 지장을 주게 되지요. 그래서 화재감식 과정에 복원을 고려해 순서와 방법을 조절한 것입니다.
그날 밤 현장에 수많은 국민이 와서 눈물 흘리는 것을 봤어요. 국보 1호 문화재가 훼손돼가는 과정을 밤새워 지켜본 분들에게 나중에 복원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건 또 다른 죄를 짓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재 현장뿐 아니라 어느 현장이든 범인 하나만 잡는 것과 이 범죄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는 건 사실 많은 차이가 있어요.
고전적인 범죄부터 1990년대 2000년대로 시대가 이어져 오면서 발생한 범죄는 그 시대 우리 사회의 정신병리가 바깥으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에 대해 단순히 범죄를 진압한 것만으로는 안 되는, 메시지가 있는 활동이 요구되는 상황이 점점 온 것입니다. 화재감식만 해도 단순히 불이 난 원인을 찾고 수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바라는 바까지 고려한 활동이 필요한 것이지요."
화재로 사라진 숭례문은 2013년 4월 마침내 복원됐다.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던 시민들의 마음을 읽은 박 반장의 감수성이 결과적으로 복원을 원활하게 한 것이 아닐까. 박 반장의 감성이 빛을 발한 사례로 1997년 1월 발생한 탈옥수 신창원 사건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주목을 받았던 탈옥수 신창원을 잡는데 이바지해 경위로 승진하고 특진을 거듭했다. 이 사건은 여형사 박미옥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