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에 있는 학도의용군 자료사진
윤태옥
학도의용군의 참전동기를 애국심이라고 집약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맥락에서 남침이란 자극을 받자 행동력이 강하게 발현된 것이다. 한국전쟁 개전 직후에 앞장서서 참전한 이들은 그 이전부터 활동해오던 우익 학생단체 또는 학도호국단과 직접 연결돼 있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하여 점령했고, 두 강대국은 자신의 점령지에 자신이 원하는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국가가 건설되도록 끌어갔다. 남한은 남한대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북한은 북한대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국가건설을 추진해가면서 강력한 원심력과 구심력이 동시에 작동했다. 남한은 우향우를 반복하면서 우편향으로 경도됐고, 북한은 좌향좌가 극단으로 쏠려가면서 남북한의 학생단체들도 격렬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좌우-남북으로 갈라졌다.
이승만은 청년단체 학생단체를 자신의 정치활동에 가장 잘 활용한 정치가였다. 정부수립 직후 일민주의와 이북총진군이란 구호를 되뇌이던 문교부 장관 안호상이 학교교육 체제에 학도호국단을 삽입했다. 모든 학생을 국군의 예비전력으로 양성한다는 목적 아래 하나의 조직으로 엮은 것이다.
이를 위해 전국총학생연맹을 포함한 모든 사설 학생단체들을 해산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학도호국단은 대통령이 총재를 맡고, 중앙학도호국단 단장과 부단장은 문교부 장차관이었고, 각급 학교의 학도호군단 단장은 총장이나 학장을 맡도록 했다. 이로써 학도호국단은 대한민국 법령으로 공인된 유일한 전국 학생조직이 되었다. 이들의 가장 큰 과업은 군사훈련이었고 매일 시가행진과 도보훈련을 실시했다. 이곳이 훗날 학도의용군의 토대가 된 셈이다.
일제패망 이후 남북분단과 좌우갈등 속에 모든 정치단체 사회단체는 물론 학생단체들도 당시의 정세에 깊숙이 결합돼 돌아갔다. 간부 학생들은 정세의 변화에 민감했고 그에 따른 행동 역시 빠르고 열정적이었다. 개전 초기에 서울을 점령당하는 최악의 전세에서 오히려 강력하게 반발하듯 자발적으로 참전을 선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의 학생들의 예비전력화 정책과 학생단체 간부들의 정치적 성향과 열정이 맞물려 학도의용군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학도의용군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애국심만 주목할 것은 아니다. 정부가 병력충원 체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엄연한 과오와 실책도 함께 주목해야 한다.
정부 수립 후 최초의 병역법은 1949년 8월에 공포됐다. 병역법은 국민개병제에 의거하여 남성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가하고 여성은 지원해 입대할 수 있도록 했다. 병사행정을 담당하는 병사구사령부를 서울과 도청 소재지에 두고 국방부의 병무국이 이를 관장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1950년 1월 대한민국 최초의 징병검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은 10만 병력을 초과할 수 없다는 미국의 한반도 지배정책에 구속돼 있는 정부는 당장 더 이상의 징병검사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이런 이유로 징병검사도 중단하고 예산절약을 위해 각 지구의 병사구사령부도 해체해 버렸다. 정치적 구호로는 북진통일이나 이북총진군을 외치면서 실제 행동은 그에 미치지 못한 채 병무행정을 공백상태로 두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남침 전면전을 맞닥뜨렸다. 개전 초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정부든 군이든 손실된 병력을 충원할 겨를이 없었다. 건군 초기라 소집할 예비역 자원도 없고, 병무행정도 이미 중단된 터라 입영대기 장병도 없었다. 국방부는 호남과 영남에 병사구사령부를 재설치해 병력을 충원하려고 했으나, 인민군이 호남지방으로 빠르게 진공하면서 그나마 영남지역에서만 가능했다.
정부는 1950년 7월 제2국민병(만 17~40세 남성)을 소집하기로 했으나 소집절차도 미비하고 피난민 대열이 휩쓸면서 정상적인 병력충원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이럴 때 학도의용군이 자진해서 참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국방부 정훈국이나 내무부 문교부 등에서 학생단체와의 소통이 있기는 했겠지만 모병당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사막에서 샘물을 만난 셈이었다. 당시 병역법에서는 학생은 징집을 연기를 할 수 있었으나 참전하겠다고 하고, 제2국민병 소집에 해당하지 않는 17세 미만도 나섰으니.
병력충원 상황에서 학도의용군을 조망하면 정부의 부실하기 짝이 없는 병무행정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학도의용군의 희생적인 참전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그 이면에 광범위하게 깔려 있는 정부의 실책과 과오를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편찬연구소도 "병력충원 체제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학도의용군이나 용감한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찬양하더라도 이러한 행정조치의 불비와 같은 정부의 준비 소홀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다시 전쟁이란 상황이 벌어지면 정부는 대책 없이 허둥대고 젊은이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그 구멍을 메우는 건 아닐까. 괜한 노파심이길 바라기는 하지만, 파리 올림픽과 한국 스포츠계를 보면 지금도 그런 게 아닌가 싶고,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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