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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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 이혜구는 한국음악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01세로 사망한 지 사망 5년 뒤인 2015년에 <한국음악연구> 제58집에 수록된 신대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 '만당 이혜구(1909~2010)의 음악사학'은 "선생님은 고대로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유물이나 악보 및 기록이 있는 모든 갈래의 음악과 그 주변 상황을 바른 우리 음악사학 정립을 위한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이러한 모든 연구 성과 중에서 3회에 걸친 <악학궤범>의 역주와 정간보를 비롯한 여러 옛 악보집에 담긴 음악 실체와 그 해독 방법에 관한 연구 결과들은 특별히 이 방면의 우리 음악사학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한국국악학회가 발행하는 위 학술지의 2020년 제68집에 실린 이용식 전남대 교수의 논문 '이혜구 만당학 성립의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 경험에 관한 논구'는 "만당 이혜구는 한국음악학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라고 한 뒤 "만당의 음악학 즉 만당학은 근대 한국음악학의 커다란 줄기를 형성했다"라며 "만당학은 많은 제자들에 의해 현재까지도 한국음악학의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연구방법론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평한다.
이혜구가 받는 이같은 학문적 존경과 배치되는 것은 그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혜구 편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이 절정에 달했을 때 30대 방송인인 이혜구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려준다.
"1939년 9월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부장 대리를 지냈고, 1941년 11월 제2방송부 편성과장을 지냈다. 1943년 6월 경성방송국은 제1, 제2방송부 제도를 폐지하고 편성과와 제1, 제2보도과를 신설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한국어 방송을 사실상 총괄하는 제2보도과장을 맡았다."
언뜻 보면 친일 이력이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일제하에서 방송국 과장을 역임한 것까지 친일행위에 포함시키는 것은 과도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 의미의 방송국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어 방송을 사실상 총괄하는 제2보도과장"이었다. 그가 이 직책을 수행한 시기는 일제가 방송을 동원해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때였다. 이런 시기에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한국어 방송의 실무를 책임졌으니, 일제의 세계 침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한국음악사를 정리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유사 이래 최악의 제국주의 침략에 가담한 것도 일제가 볼 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 일에서 선전전을 담당했으니, 세계사적 의미에서 보면 후자의 역사적 의의가 더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정리하는 데 일조했다고 해서 결코 덮이지 않을 범죄를 그가 일제 막판에 저질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제 말기에 방송이 전쟁 도구로 전락
대한제국 멸망 1년 전인 1909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혜구는 경성고등보통학교부속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훗날의 경기고)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본과 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런 다음, 23세 때인 1932년에 한국방송공사(KBS) 전신인 경성방송국에 입사했다.
처음에 담당한 프로그램은 학예와 어린이 코너였다. 1년 뒤인 1933년에는 국악 프로그램 편성 쪽으로 담당 업무가 바뀌었다. 그로부터 6년 뒤부터는 편성과장·보도과장 등을 역임하게 됐다.
그가 편성과장과 보도과장을 지내던 시기의 경성방송국은 일반적 의미의 방송국이 아니었다.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송국이 아니었다. 식민지 방송을 관장한 조선방송협회를 다룬 강혜경 숙명여대 교수의 논문 '일제 말기 조선방송협회를 통해 살펴본 방송 통제'(2011년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9권)에 이런 설명이 있다.
"1938년 총독부는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서도 적용하여 국민정신총동원령을 공포하고 7월 1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창설하여 모든 보도기관에 여론의 지도와 통제, 시국 인식 보급을 강요함에 따라 방송의 전쟁수행 도구로서의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일제 말기에 방송이 전쟁 도구로 전락했다고 지적하는 이 논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는 전시체제가 되면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중문화를 접하는 것도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이 시기의 방송은 오로지 전쟁 방송이었다. '오로지'란 표현이 과장되지 않는다는 점은 위 논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도 확인된다.
"1941년 4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인사들까지 참석하는 총력방송연구회를 신설하여 매달 1회씩 개최했으며, 방송심의회도 이해 12월에 총력방송심의회로 개편됨으로써 방송은 오직 전쟁방송으로서의 기능만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혜구는 1941년에 편성과장이 되고 1943년에 보도과장이 됐다. 그런 시점에 "오직 전쟁방송으로서의 기능만을" 강요받는 보도 책임자가 됐다. 탄핵 제도가 있었다면 탄핵소추와 탄핵심판을 여러 번 받고도 남았을 일이다.
일본의 국운이 걸린 그런 긴박한 시기에는 소소한 실수만 해도 교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기에 승승장구했다. 변덕스럽고 예측불허의 전쟁 국면에서도 일제의 요구를 무리 없이 소화해냈던 것이다.
일제의 침략전쟁 선전전에서 핵심 역할 수행
1932년부터 1945년까지의 방송국 근무 기간 중에서 1938~1945년은 방송이 전쟁 도구로 확실히 전락한 기간이다. 이 기간에 침략전쟁을 선전해 주고 봉급을 받았으니, 그가 벌어들인 수입은 친일 재산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친일 재산에 의존하며 살았던 그가 36세 나이로 맞이한 해방 뒤에는 색다른 모습을 보였다. 보통의 친일파에게서는 보기 드문 행적이 나타났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후, 1945년 9월 초대 서울중앙방송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9월 미군정과 갈등을 빚으며 사직했다"고 설명한다. 훗날 KBS가 될 방송국의 사장이 됐다가 미군정과 사이가 틀어졌던 것이다.
1947년 7월 15일 자 <경향신문>은 이혜구가 전날 사표를 제출한 일을 전하면서 "사무 운영에 있어 미국인 고문들과 사이에 원활치 못한 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그해 8월 7일 자 <동아일보>는 한국 내 반탁투쟁에 대한 소련의 시각을 방송에 내보냈다가 서울고검의 조사를 받은 일도 있다고 보도했다.
신탁통치를 주도한 쪽은 미국인데도 남한 언론과 보수세력은 이를 소련의 작품으로 호도하고, 신탁통치 방안의 핵심은 통일적인 한국임시정부 수립인데도 언론과 보수세력은 이를 자주독립의 연기로 호도했다. 이혜구는 이에 대한 소련의 불만을 방송에 내보냈다. 일반적인 친일파들과 달리 모스크바 3상 회의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직'을 걸고 진실을 보도할 생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군정과의 갈등으로 방송국을 떠난 이혜구는 정부수립 이듬해에 복귀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9년 8월 다시 서울중앙방송국장을 맡았다가 50여 일 만에 그만두었다"고 설명한다.
그 뒤 그는 음악학자의 길을 걸었다. 미군정과 갈등을 빚은 1947년에 서울대 국악과 교수로 임용된 그는 1954년에 한국국악학회 회장이 되고 1970년에 서울대 음대 학장이 됐다. 1975년에는 예술원 회원이 되고, 95세 때인 2004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혜구의 인생 행적에는 알쏭달쏭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일제의 침략전쟁 선전전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인류를 상대로 하는 이런 범죄행위를 빼놓은 채, 한국음악사의 선구자로만 떠받드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음악사 정리에 끼친 공헌을 인정하더라도, 몇 번이고 탄핵받고도 남을 만한 친일 방송인이었다는 점을 그에 대한 평가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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