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16 06:57최종 업데이트 24.08.16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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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정훈님, 파리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2주 동안 대표팀 선수들을 응원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속으로 '이제 국민들이 올림픽에 별 관심 없을 걸'이라고 냉소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더군요.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 저는 두 곡의 노래를 유독 많이 들었습니다. 먼저 김연우의 '그곳에 올라'입니다. MBC 측이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맞아 응원가로 제작했고, 그 이후 김연우씨 버전이 12년째 국제 스포츠 대회 방송 때마다 쓰이고 있습니다. 음원 서비스도 되지 않아 평소에는 듣기 힘든 곡이기도 합니다.

결승전에서 금메달, 혹은 3·4위 전에서 이겨서 동메달을 딸 경우에 메달 소식을 알리는 자막과 동시에 '그곳에 올라'가 나옵니다. 저는 다른 방송사를 보다 가도 메달을 획득한 순간에는 MBC로 채널을 돌립니다. 순전히 이 곡을 들으며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요. 김연우씨가 부르는 첫 소절 "한 걸음"이 나오면 "정말 메달을 땄구나"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들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그곳에 올라'가 나오지 않는 SBS나 KBS에서 송출되는 승리의 장면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선수가 은메달을 딸 경우에는 조금은 차분한, 융진씨의 어쿠스틱 버전이 나옵니다. 같은 가사지만 그건 또 위로의 격려의 곡 같습니다. 보통 김연우씨 버전을 들어오셨을 텐데, 융진씨 버전도 좋으니 정훈님도 찾아서 들어보시길 권해봅니다.

'봉우리'가 주는 위로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가 지난 7월 2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 연합뉴스

 
또 다른 곡은 고 김민기 학전 대표(아래 김민기)의 '봉우리'입니다. 제목은 '그곳에 올라'와 유사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저나 정훈님은 김민기 세대는 아니죠. 저는 대학 다닐 때 운동권도 아니어서 그의 곡을 부를 일도 없었고요. 그런데 가수 김현철씨가 2014년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해서 '봉우리'가 정말 좋다고 극찬을 했고, 그때 '봉우리'를 처음 들어본 저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한참 걷다가 목소리에 이끌려서 어딘가에서 우뚝 멈추어 서버린 기분, 사람을 잡아 이끌어서 머물게 하는 힘이 있는 곡이었습니다.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라는 내레이션이 끝나고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라고 노래가 시작되는 대목, 숨이 턱 막혀옵니다. 이어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라고 낮게 읊조리는 부분에선 아득한 기분이 듭니다. 끝에 "친구야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까지 들으면 괜히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게 됩니다.

'봉우리'는 1984년 LA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카이브K의 2019년 김민기(2024년 2월 온라인에 공개) 인터뷰에서 이곡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등장합니다.

<모래시계>로 유명한 송지나 작가가 MBC에서 올림픽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해서 "금메달리스트 대신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 해봐라"라고 조언했고, 이에 송지나 작가가 "그렇게 할 테니까 아저씨(김민기)가 주제곡 주세요"라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실제로 MBC 다큐멘터리 <내일을 향해 달려라>에 쓰였고요. 인터뷰이가 "'봉우리'는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낮은 목소리라고 느껴진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깨져본 놈들을 위한 곡이니까."

저는 체육 시간 달리기를 할 때마다 두려웠습니다. 8명 중에 보통 7등이나 8등을 했거든요. 한 4~5등 정도라도 하면 괜찮을 텐데, 항상 가장 뒤처지는 편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을 보면서도 첫 경기에서 탈락하거나 애초에 순위권 경쟁에서 밀린 선수들, 서글프게 우는 이들에게 마음이 더 쓰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4년 내내 이날을 위해 연습했을 테니까요.
 

지난 4일 파리올림픽 여자 핸드볼 종목 한국-덴마크전 패배 직후 고개를 떨군 류은희 선수 ⓒ AP/연합뉴스

 
이번 올림픽에선 구기 종목 중 유일하게 올림픽에 참가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주장, 류은희 선수(헝가리 교리)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4일 한국-덴마크전, 1승 4패로 예선 탈락이 확정되던 순간 고개를 떨군 그의 모습에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그는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 게임 결승에서 일본에 패배했을 때도 "고참 역할을 못했다" "언니들의 업적을 이어가지 못했다"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울었습니다. 이번에는 '마지막 올림픽'이라면서 의지를 불태웠지만, 세계의 벽이 너무나 높았습니다. 첫 출전한 2012 런던 올림픽에서 4등을 한 뒤, 연이은 세 번의 올림픽에서 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저는 대표팀 은퇴를 시사한 류은희 선수에게 감히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국민들은 여자 핸드볼 대표팀을 충분히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고, '우생순' 신화를 이어가지 않아도 괜찮다고요. 대중의 무관심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대표팀을 만들어줘서, 어려운 시절을 버텨줘서 정말 고맙다고요. 이제 더 오르지 않아도 됩니다.

올림픽 그 후
 

서울대발전재단이 학부모들 대상으로 배포한 차량에 붙일 수 있는 '서울대 가족 스티커'의 모습. ⓒ 서울대발전재단

 
정훈님, 올림픽이 끝나고 주변을 돌아보니 곳곳에 솟아있는 '사람들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높고 뾰족한 봉우리'가 위압감 있게 다가옵니다. 한두 개가 아닙니다. 부동산이나 주식투자로 부자가 된 사람, 줄을 잘 타서 성공한 정치인, 건물주, 좋은 학벌, 한강 변의 아파트, 멋진 외모 등... 그런 표식을 갖기 위해 경쟁하라고,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우리 사회는 요구합니다.

멈추어 서거나, 내려가거나,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행렬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자가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봉우리로 올라가는 척은 해야 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불만 있으면 너도 노력해서 올라오라고.' 이 말에선 숱한 스포츠의 결과처럼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은 생략됩니다. 또한 올림픽과는 다르게 현실에서 봉우리로 가는 길은 '출발점'이 다른 경우가 많다는 점도 감춰집니다. 누군가는 시작부터 높은 봉우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삶이 어쩌면 올림픽보다 더 잔인한 것일 테고요.

최근 서울대발전재단이 차량에 붙일 수 있는 '서울대 가족 스티커'를 배포하고 나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SNS 상에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서울대 로고에 "프라우드 패밀리(자랑스러운 가족)" "프라우드 패런츠(자랑스러운 부모)" "아임 맘" "아임 대드"라고 적혀있더군요. 스티커 배포 사업 이후 2100여 명의 학부모가 받아 갔다고 합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부모도 '프라우드 패런츠'라는 문구가 있는 스티커를 차량에 붙이진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련 기사: "난 서울대생 부모" 스티커, 서울대가 밝힌 제작 이유 https://omn.kr/29t1m)

'서울대 가족 스티커'는 높고 뾰족한 봉우리 위에 반듯하게 붙어만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식의 우수한 입시성적이 부모의 큰 업적이 된다는 기이한 현실을 상징하듯요. 학벌의 노골적인 특권화가 부끄럽거나 터부시할 일도 아닌 세상에선, 능력주의와 천민 자본주의에 맞서는 "여기가 봉우리"라는 김민기의 외침이 힘을 잃는다는 사실이 착잡하기만 합니다. 평생 '학연'과는 동떨어진, 서울대 간판을 팔지 않는 삶을 살아온 김민기가 생전에 이 스티커를 봤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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