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4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가두행진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 이뤄진 2017년엔 찬성 여론이 80% 안팎이었다. 이날 토론회에서 안 소장은 2016~17년의 '촛불시민혁명 시국'과 현 탄핵 국면이 여러 면에서 닮았다면서도 몇 가지 차이점을 거론했다. 무엇보다도 당시는 정권 말기였고 지금은 초중반이라는 점이 다르다. 아무리 형편없는 정권이라도 탄핵은 좀 이르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있다.
당시에는 전국 2300개 시민사회단체가 '박근혜 퇴진 비상국민행동'이라는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단일대오를 형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민사회단체들의 투쟁 방식이 탄핵, 퇴진, 규탄, 비판 등으로 제각각이고, 다수의 시민사회단체가 탄핵 또는 퇴진 투쟁에 동참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야당이 탄핵에 동참했던 그때와 달리 진보당과 사민당 외에는 탄핵을 당론으로 정한 정당이 없다(토론회 이후인 7월 25일 조국혁신당은 탄핵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언론지형도 다르다. 그때는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대다수 언론이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비판하고 탄핵 분위기를 고조했지만, 지금은 진보 성향 소수 언론만이 나서고 보수 및 중도 성향 언론이 소극적이어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역부족이다. 아직 정권의 힘이 건재한 탓에 대통령이 특검법을 계속 부결해도 뾰족한 대응 수단이 없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안 소장은 "국민의 시간과 국회의 시간은 차이가 있다"면서 "대규모 국민 저항을 위력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진단에는 과거 박근혜 탄핵을 주도했던 경험과 교훈, 현재 매 주말 촛불집회를 주도하면서 느끼는 문제점과 고심이 담겨 있다.
나는 안 소장의 분석에 대체로 공감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의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바로 탄핵 학습효과다. 뭐든지 한번 해보면 두 번째는 쉽게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 문제는 이런 관행에 맞지 않는 듯싶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타난 집회 현장 분위기와 탄핵 여론조사 결과는 인식과 실천의 틈새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생각은 있지만 행동은 망설이는 것이다.
탄핵의 부정적 학습효과
7년 전 달콤했던 탄핵의 열매는 문재인 정부의 '실패'와 함께 쓴맛으로 바뀌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게다가 탄핵의 궁극적인 귀결이 검찰정권 출범이라니. 당시 탄핵대열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허탈함과 더불어 탄핵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정권의 무능과 폭정을 견디기 힘들지만, 끌어내린다고 해서 더 좋은 세상이 온다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학습효과의 밑바탕에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도사린다. 대놓고 말하자면,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신뢰 문제다. 굳이 여론조사 결과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민주당에 대한 신뢰도나 지지도는 높지 않다. 흔히 하는 말로, 윤석열 정권이 싫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정권 심판론에 힘입어 압승한 22대 총선 결과를 두고 21대 대선을 낙관하는 건 아전인수다.
역사가 진보하는 과정에 좀비처럼 튀어나오는 반동은 고통스럽다. 상실감을 안기고 냉소주의나 패배주의에 젖게 한다. 탄핵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다. 혁명은 진보적 열망에서 비롯되지만, 때로 끔찍한 반동을 불러와 진보를 짓누르거나 후퇴시킨다. 1642년의 청교도 혁명이 그랬고,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그랬다. 그래도 두 혁명은 길게 봐서 역사의 진보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무슨 진보를 이뤘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그렇다.
탄핵의 필요조건은 갖췄지만, 충분조건은 갖춰지지 않았다. 충분조건의 핵심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믿음이다. 일찍이 공자는 정치의 본질을 경제(식량)와 안보(군사), 신뢰(백성의 믿음)라고 규정했는데, 그중 신뢰를 으뜸으로 꼽았다. 한국의 정치권이 마땅히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다.
탄핵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7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방송통신위원회 2인 체제 운영을 막을 방송통신위원회 설치·운영법 개정안(방통위법) 표결을 앞두고 동료의원과 대화하고 있다.
남소연
유력한 수권정당인 민주당이 신뢰와 희망을 주지 못하면 탄핵은 성공하기도 어렵거니와 당위성에도 금이 간다. 당연한 얘기지만, 진보 진영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중도층이 합세해야 한다. 1987년의 시민혁명이 그랬고, 2017년의 촛불혁명이 그랬다.
여론은 강물과도 같다. 본류와 여러 지류가 합쳐져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민심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탄핵 학습효과가 있기에 냉정하고 신중하게 판단할 것이다. 냉소와 비관, 그리고 불신은 현실 참여를 망설이게 한다.
탄핵 열차는 출발했지만, 연료가 부족하다. 이를 채우는 건 민주당을 비롯한 정치권의 몫이다. 탄핵이 진보를 위한 고육지책이라면 민주당부터 거듭나야 한다. 무도한 정권의 폭주를 멈추게 하려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춰야 한다. 행정부 권력이 워낙 막강한 만큼 의회 권력을 총동원해 맞서는 것은 자연스럽고 삼권분립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수사권과 공소권을 남용한 정치검찰에 대한 강력한 견제는 정당하다. 다만 검사 탄핵이나 재판부 압박이 법치주의나 사법질서 흔들기로 비쳐서는 곤란하다. 정치적 목적이 개입하면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라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비록 현 정권에 의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정의와 공정은 여전히 한국인에게 소중한 가치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시민의 눈에 거슬리는 행태는 지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민생과 실용 구호 못지않게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도 중요하다. 차기 대선 판도의 '변수'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탄핵 이후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신뢰감과 안정감을 줘야 한다.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탄핵은 필요하지만, 탄핵만 외칠 때가 아니다. 탄핵 이후 세상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국민적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검찰정권의 막장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언론을 탄압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만 봐도 그렇다. 자질과 능력이 의심스러운 인사들을 동원해 방송을 장악하려는 작태는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다. 최근에는 대통령 명예훼손 수사와 관련해 언론계 인사들을 겨냥해 마구잡이로 통신조회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대상자가 수천 명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왔다.
독재정권의 전형적인 말기 증세다. 탄핵을 자초하는 건 자유지만,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다. 나라의 불행이고 국민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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