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7월 18일 자 <동아일보> 2면 우하단에 실린 이정섭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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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이처럼 승승장구하며 두 번째 올림픽을 개최한 1924년에 파리에 체류한 25세의 한국인 유학생이 있다. 머지않아 서른을 전후한 나이에 친일파로 변신하게 될 이정섭이 그 주인공이다. 1899년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한 그가 파리 올림픽 현장에 있었다는 점은 그의 사진이 실린 1926년 7월 18일 자 <동아일보> 2면 우하단에서 확인된다.
"함흥군 주서면 상리 리뎡섭 씨는 지금으로부터 칠년 전에 본국에서 보성중학을 마치고 불국(佛國)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고등중학을 맛치고 국립파리대학에서 문과사회학을 공부하다가 지난 삼월 삼십일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작(昨) 17일 오전 일곱시 사십오분 차로 입경하엿는데 ······"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서구화(이른바 근대화)의 모델로 삼은 나라가 독일과 프랑스다. 그런 프랑스에서 파리대학을 졸업했으니, 이정섭의 주가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위 기사의 부제목도 "작일 금의로 환향한"이다.
금의환향한 이정섭은 처음에는 민족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정섭 편은 "1926년 7월 귀국하여 이듬해 1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준다.
파리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는 이야기가 유력 일간지에 보도될 정도로 주목을 받은 인물이 대규모 민족주의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했다. 일제 당국이 자기를 주시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 수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했다. 이 시기의 그가 민족주의로 기울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민족주의 성향은 중외일보사 논설기자 시절인 1928년의 필화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중외일보>의 간판 기자가 된 그는 1927년 상반기에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중국인들의 혁명 투쟁을 기사에 담고, 그해 하반기부터 이듬해 상반기에는 3·1운동 민족대표 최린과 함께하는 세계일주 기행문을 연재하다가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관한 글을 썼다. 그의 기행문에는 "자치에 만족 말고 최후 목적을 달(達)하라"라는 대목도 있었다. 구속시킬 테면 시켜보라는 식으로 글을 썼던 것이다.
총독부 당국이 자기의 기사를 삭제하자, 그는 삭제 사실까지 다음 기사에 쓰면서 "붓을 집어던지고 십흔 생각이 잇스나, 그래서는 기행문의 자살행위가 됩니다"라며 검열 당국에 대한 정면도전의 의지를 표시했다.
2012년 2월에 <신문과 방송>에 게재된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기고문 '아일랜드 기행문 꼬투리...총독부, 기소·정간 탄압'은 이정섭의 과감한 글쓰기에 대한 일제의 대응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검찰이 법원의 일부였던 당시의 법제를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할 장면이다.
"1928년 2월 27일 오전 10시 30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차석검사 나카노와 마쓰마에 검사의 지휘 아래 종로서 형사들이 자동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중외일보에 들이닥쳤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소속 검사는 다섯 명이었는데 두 명이 출동한 것은 사건을 매우 중대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수사진은 중외일보 편집국과 주간 이상협(편집 겸 발행인), 논설반 기자 이정섭의 가택도 수색하여 원고 등을 압수했다."
친일파로 변신한 기자의 행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