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뉴엘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7일 총선 2차 투표를 위해 르투케파리플라주에 있는 투표소를 찾은 모습.
EPA/연합뉴스
극우 집권을 막아야 한다며, 극좌 세력과 연합 전선을 구축한 집권당의 모습은 야릇한 미소를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집권 이후 극단적 신자유주의자-글로벌리스트의 노선을 취해 온 이들은 공화당에게 우파의 공식 타이틀을 내주고, 자신들이 중도인듯 위장해 왔으나, 내용 면에선 공화당보다 더 선명한 글로벌 친자본 세력이다. 마크롱은 국민적 반대 속에도 고소득자 연금시장을 다국적 자산관리회사들에 개방하고자 연금개혁을 강행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미국 네오콘과의 협력에 충실한 민심 이반의 행보를 계속해 왔다. 그래서 그는 국익보다 글로벌리스트들의 이해를 받드는 머슴으로 비쳐온 것이 사실이다. 집권당의 이러한 행보는 국익을 먼저 내세우는 국가주의 정당의 성장에 물을 줘온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자초한 폭탄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된 집권당은 신인민전선과의 연합 전선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완벽한 몰락이 예고되었던 마크롱 진영은 참패를 모면하고, 2등 자리를 챙기면서, 내심 안도한 모습이다. "수치스러운 결과지만, 중도의 건재함을 보여준 결과"라는 자족적 평이 선거 당일 밤 엘리제궁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선전했을 뿐이다. 마크롱 진영이 감당해야 하는 '수치'는, 그것도 자발적으로 판 무덤이란 점에서 더욱 명확하다. 2022년 245석을 얻었으나, 이번 선거에서 87석을 잃으며, 이미 통치불능 상태였던 기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들이 확보한 163석을 통해, 극우와 극좌가 손을 잡아도 대통령을 탄핵(의석수의 2/3)을 강행할 순 없는 저지선을 확보했지만, 의석수 1/2이 필요한 국회의 정부 불신임안 결의(즉 총리 불신임)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전임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시절, 1년 반 동안 악명높은 헌법 49조 3항(국가 비상시기, 국회 표결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만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헌법상 예외 규정)를 무려 27회나 사용하며 의회를 무시하고 정부 법안을 강제하던 독재의 방식은 이제 쉽게 구사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관례상 새로운 선거 결과에 따라 대통령은 신임 총리를 임명하고 새로운 내각을 꾸려야 하나 선거 직후 사표를 제출한 아탈 총리의 사표를 마크롱은 일단 반려한 상태다. "불안한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달라"는 말과 함께. 불안의 진원지인 그가, 어떤 해법을 자신의 변화 없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의 판단을 더디게 하는 것은 압도적 다수가 나오지 않은 선거 결과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좌파 진영에선 망설이는 대통령에게 '우리가 승자임을 인정하라'는 압박이 연일 흘러나온다. 이번 선거로 재선 의원이 된, 굴종하지 않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뤼팽 의원은 "이젠 에마뉘엘 마크롱이 민주주의 제도를 존중해야 할 시간"이라면서, 마크롱이 패배를 인정하고 좌파 진영의 총리를 임명할 것을 종용했다.
불안한 우산, 승리의 대가

▲조기총선 다음날 리베라시옹지의 1면 공화국 광장에 모여들어 승리를 축하하는 좌파 지지자들과 "우프" 라고 제목을 뽑은 리베라시옹지의 선거 다음날 표지다. 극우 프랑스를 막아낼 수 있었던 안도감을 표현한 이 표지는, 이 선거의 의미를 압축해준다.
리베라시옹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입증해 준 선거였다. 언론의 예견들은 대부분 빗나갔다. 농익은 정치 공학과 변화를 바라는 민심, 절묘한 타이밍, 탁월한 슬로건이 빚어낸 연금술의 결과였다.
신인민전선의 승리가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압도적 과반의 승리가 아니더라도, 거대한 환호성이 광장에 터져나가게 만들었던 것은 모든 공식을 비껴간 예기치 않은 뜻밖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좌파가 멸종해 가던 정치 지형 속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번 승리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그들의 승리는 적지 않은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과거의 흔적을 잃고 급속히 고사해가던 사회당(2022년 의석수 31명)은, 신인민전선이란 큰 지붕 속에서 62명의 의원을 탄생시키며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들은 마크롱을 배태한 정치세력이다.
심지어, 이번 선거에선 마크롱을 엘리제궁 경제 자문으로, 이윽고 재경부 장관으로 임명했던 전직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좌파이기보다 오히려 좌파의 적이었던 인물이다. 신인민전선의 큰 우산 아래 다시 회생의 기회를 잡은 이들은 얼마든지 마크롱 세력과 연합하여 유권자를 배반할 수 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스스로 실족사의 길을 가고 있던 마크롱 세력을 건져준 것도 신인민전선이 져야 할 짐이다.
많은 시민들이 국민연합의 바람을 응원했던 것은, 가장 커다란 변화가 그들을 통해 가능하리라 점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변화의 열망을 이제 신인민전선이 짊어지게 되었다. 국민들은 그들에게 즉각적인 답을 요구할 것이며, 이제 곧 승자의 텐트 속에서 모략과 배반, 반전의 시간이 숨돌릴 틈 없이 다가올 것이다. 지난한 진흙탕 싸움 속에서 한송이의 연꽃이 피어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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