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지난 6월 18일 북한 평양 공항에 도착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영접을 받고 있다.
스프투니크통신=연합뉴스
푸틴은 역시 푸틴이었다. BBC 보도에 따르면, 초기 푸틴의 방북 일정은 18일부터 1박 2일 일정이었다. 그러나 푸틴의 전용기는 19일 오전 2시가 넘어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다. 이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홀로 순안 공항 활주로에서 푸틴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새벽 2시에 도착한 푸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환대를 받고 바로 준비된 숙소로 이동했다. 결국 푸틴의 공식 일정은 도착한 당일 정오에 이루어졌고, 그날 저녁 푸틴은 바로 베트남 하노이로 떠났다. 24년 만에 이루어진 푸틴의 방북은 계획되었던 1박 2일이 아닌 당일치기가 된 것이다.
평소 정상회담에 지각하기로 유명한 푸틴이지만, 이번에는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외교적 결례다. 이는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물며 모든 것이 사전에 준비되고, 이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의전을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려한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외교참사다. 일반적인 정상이라면 이 같은 행동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푸틴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어야 하거나 이를 통해 외교적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푸틴은 지난 2007년 러시아 소치에서 독일 총리가 된 메르켈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푸틴은 메르켈이 개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자신이 기르던 검정 리트리버 '코니'를 정상회담장에 풀어두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상으로서 과연 이게 할 짓인가.
그렇다면, 푸틴은 왜 굳이 무례하게 '새벽 2시'에 도착했을까? 러시아 정부는 이번 방북의 정치·군사적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우크라이나와 전면전을 펼치고 있는 러시아 대통령이 독재국가인 북한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외교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BBC에 따르면, 러시아의 외교관계는 '선린 우호 관계 - 상호 신뢰하는 협력관계 - 전략적 동반자 관계 -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 - 전략적 동맹' 순으로 총 다섯 단계로 나뉜다. 즉, 이번 방북으로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선린 우호 관계'에서 세 단계나 격상됐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자칫 중국, 미국 그리고 한국 등 주변국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인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북한의 지속적인 도움, 특히 무기 지원에 대한 외교적 답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북한과의 과도한 결속을 보여주면서 한반도에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하는 것은 피
하고 싶었던 듯하다.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란?
이번 북한과 러시아의 조약에 대해 대다수의 언론은 조약 4조항(article 4)에 집중한다. 이 4조항은 상호 간의 군사적 협력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양국 중 어느 국가가 제3국으로부터 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면 양국이 '유엔 헌장 제51조'를 언급하며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기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이번 양국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마치 지난 1961년 북소 동맹조약의 부활처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번 조약에서 상호 간의 군사지원이 명문화된 것은 북한의 외교적 성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약의 형태가 '동맹'이 아닌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라는 점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번 조약을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이라고 표현한다. 1961년 소련과 맺은 조약은 "동맹조약"이라고 명명하였으며, 2000년 러시아와의 맺은 조약은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이었다. 따라서, 이번 조약의 내용과 함께 이 외교적 수단(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외교수단으로써 '동반자 관계'를 '동맹'과 비교해 보면 간략하게 두 가지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동반자 관계는 탈냉전이라는 국제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외교수단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냉전 시기에는 대부분의 외교가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탈냉전 시기에는 진영을 넘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많은 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둘째, 동맹이 군사·안보 분야의 협력이라면 동반자 관계는 단계는 다양하지만 경제분야가 협력의 공통분모라는 점이다. 이는 경제라는 하위 정치 분야의 협력을 매개로 과거 교류가 없었던 두 국가 또는 행위자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측면이 있다. 이후 지속적인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 경제 분야의 협력을 고리로 정치·군사와 같은 고위 정치 분야의 협력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북한과 러시아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우리가 보고 싶은 '군사적 측면'만을 확대해석 하기보다는 이 외교수단이 가진 의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푸틴은 지난달 18일 방북을 앞두고 서방의 통제를 받지 않기 위해 상호 간 무역에서 결제를 루블화로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대북 제재를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지점이다.
또한 푸틴 방북 직후인 지난달 27일 러시아의 수의·식물감독청은 북한과의 농업 부문 협력을 통해 향후 러시아가 북한산 사과와 인삼을 수입하는 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양국은 서로가 처한 외교적 현실과 현재 동북아의 외교 상황을 고려해,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군사안보적 측면보다는 경제적 분야의 협력에 집중하면서 서로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번 북한과 러시아의 외교에 대해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 정부는 오인(misperception)하지 말아야 한다. 벌써 우리 정부는 한미일 공동 성명을 발표하며,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재검토를 시사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지난달 27일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러시아를 향해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답게 처신하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물론 우리 외교부 입장에선 반발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의 가능성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특히, 우리가 보고 싶은 부분만을 확대할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의 특성을 고려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양국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은 것은 웹사이트 '노스 코리아 리더십 워치' 마이클 매든 연구원이 평가한 것처럼, 북한과 러시아가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그들의 협력은 기회주의적이고 거래적 성향이 강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우리의 외교행태를 살펴보고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는 현재 한미일 관계를 '동맹'으로 지칭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해 한미일 데이비드 캠프 정상회담 이후 6월 말 진행된 '프리덤 에지' 연합 군사훈련을 보면 어떤가. 제3국, 특히 북한과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한미일은 '동맹'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에 단순히 러시아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외교 현장에서 우리의 외교를 바라보는 상대의 입장과 전략을 간파하는 외교전략이 필요하다. 나아가 푸틴은 여전히 한국과의 관계 개선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듯하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이번 방북에서 엄청난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 굳이 새벽 2시에 도착한 것이며, 실제 푸틴은 방북 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러 관계를 회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현재 외교 현실을 고려해 러시아와 공식적인 외교협상을 하기 어렵다면, 물밑외교만이라도 활발하게 펼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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