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점복사, 독경사, 관현맹인 등 시각 장애인 전문 일자리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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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 초기에 잠시 천인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세종은 시각 장애인 점복가를 위해 관상감 소속 '명과학'이란 관직을 두어 직급과 녹봉을 주었다. 그리고 맹인 학생을 선발해 교육했다. 주로 왕후나 공주 등이 주관하는 내궁 향연에서 연주하던 장악원 소속 관현맹인(管絃盲人)이란 악사는 잠깐 폐지된 적은 있었지만 조선 말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시각 장애인은 경을 외워 읊으면서 병을 고치고 영혼을 달래는 독경사에도 많이 종사했는데, 이들은 대우도 좋고 수입도 많은 편이어서 시각 장애를 가진 양반집 여자들도 선호했다고 한다.
시각 장애인은 만통사(혹은 만통시)라는 단체까지 구성해 국가의 행사에도 참여했는데 태종과 세종은 이곳을 공식 후원하기도 했다. 기록상으로는 아마도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가 아니었나 싶다. 시각 장애인들은 이후에도 맹청과 같은 단체를 결성해 꾸준히 활동했다.
조선 시대에는 점복가와 독경사를 판수라고도 불렀다. 비록 성리학의 유교 국가였지만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과 악귀를 몰아내어 치료하는 것은 왕궁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널리 퍼진 관습이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일제 강점기 이전 판수는 대우받고 돈도 버는 아주 좋은 직업이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 시각 장애인의 역사>(이만수 지음)를 읽어보면 좋겠다.
제국주의와 우생학의 시대, 나락으로 떨어진 장애인
이처럼 지금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정책이 커다란 변화를 보인 것은 구한말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란 없기에 그냥 조금 더 불편한 사람에 불과했던 장애인이 이 시기에는 생의 밑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고, 인간 이하의 멸시와 능욕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의 흑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왕명으로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배우러 갔던 수신사나 서구 사회를 경험하고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일본과 서구 사회를 소개하고 구체적인 개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나라에는 이를 실행할 힘이 없었다. 구한말 조선은 외세와 탐관오리들의 부패에 시달렸고 왕족들은 그들끼리의 권력다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폭정으로 인한 극심한 빈곤과 가혹한 처우, 임술농민봉기에서부터 동학농민운동을 거쳐 항일 의병에 이르는 피 끓는 항쟁, 이 과정에서 장애인이 속출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더 많은 장애인이 속출했다. 여전히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고단한 삶에 더해 전차나 공장, 탄광과 같은 산업 시설에서 희생된 이들이 장애인이 되어 거리로 내쫓겼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뒤늦게 제국주의에 뛰어든 일본의 눈에 식민지 조선의 장애인들은 그저 방해물일 뿐 보살핌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학교나 병원을 세워 장애인을 돌보기도 하고, 일부 지식인들이 노력하기도 했지만, 한마디로 새 발의 피였을 뿐이다. 일제 역시 '제생원 맹아부' 같은 교육기관을 세우고 치료 시설이나 보호 시설을 만들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인을 위한 것이거나 눈가림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법을 만들어 장애인을 차별하고, 자기들의 책임이 닿지 않는 곳으로 유폐해 버렸다.
1930년대 전 세계를 휩쓴 '우생학'도 한몫했다. 보통 우생학 하면 히틀러의 나치를 떠올리지만, 이를 최초로 법제화한 나라는 미국이었고 그 후 자본주의 국가에 널리 퍼졌다. 당연히 일제도 이를 중요시했고, 우리나라 지식인 중에도 이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냥 환자에 불과했던 장애인의 호칭이 무언가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란 뜻의 일본어 '후구샤(不具者)'에서 유래한 '불구자'가 됐다. 그리고 민간이 부르던 병이든 몸이란 뜻의 '병신'은 욕이 됐다.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해 조선인 스스로 장애인을 격리하거나 사회에서 제거하게 하려는 일제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