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7일 당시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이재명 대표.
남소연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안전보건 부문에서 가장 후진적이지만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법률은 가장 많다. 최근 몇 년간 더 많은 법률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조직을 신설했다. 업종의 유해·위험 등 특성을 반영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책임의 소재와 무게를 핵심으로 하는 '책임의 체제'는 더 불분명해졌다. 책임의 체제는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작금의 이런 현상을 보면 애버밴 참사 이후 영국 사회의 안전을 대진단한 보고서인 '로벤스 보고서'가 떠오른다.
"우리는 법이 너무 많고, 너무 많은 법이 불만족스럽다고 제안했다. <중략> 노동안전보건 행정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경계선이 너무 많고, 그 경계선이 계획에 따라 그려진다기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규제의 양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복잡하다. 공장, 상업시설, 광업 및 채석업, 농업, 폭발물, 석유, 원자력시설, 방사성 폐기물 처리, 알칼리 배출을 다루는 9개의 별도 안전보건 그룹이 있다. 잉글랜드의 경우 행정과 집행에 대한 책임은 5개의 정부 부처와 7개의 별도 감독국 간에 나뉘어 있다. 또한 지방정부 당국의 광범위한 개입도 있다."(로벤스 보고서, 1972년)
최근 한국 사회에서 산업안전보건에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산업안전보건 정책 리더십이 부실한 상태에서 원심력만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형국이다. 산업안전보건 당국의 정책 및 연구역량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각 부처가 노동안전보건에 관한 법률을 우후죽순으로 입법하는 것은 마치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의 퇴행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이 종사자별 노동안전 관련 특별법이 분화·제정되는 후진적 국가안전시스템을 타개하는 돌파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법은 2007년 제정된 영국의 기업 과실치사법(CMCH Act)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실제 기능은 1974년 제정된 영국 산업안전보건법(HSW Act)의 기능, 즉 노동안전보건의 일원화에 일조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성패는 리더십을 발휘할 기관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달려있다. 위 로벤스 보고서의 제안에 따라 설립했던 영국의 HSE는 각 산업별 노동자 보호에 관한 법률들을 산업안전보건법(Health and Safety at Work Act)에 따른 명령 체계에 수렴했다. 단 산업별 전문성과 자율성을 유지 또는 극대화하기 위해 산업별 인증실무규범 제도를 마련했다.
이것이 바로 '자기규율(self-regulatin)'이고 로벤스 보고서의 핵심 권고사항이다. 이를 과거엔 '자율규제'라고 번역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원칙 규정을 준수하되 업종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업종 내 이해당사자들이 실행 가능한 최대한의 안전기준을 스스로 규범화했다는 점, 그리고 처벌 근거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자기규율'이라는 고용노동부의 최근 번역은 비교적 적절하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이 산업안전보건본부로 승격했다. 또한 연구실, 국가·지방자치단체, 해운·항만 등에서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고용노동부 관할이 됨으로써 고용노동부의 보편적인 산업안전보건 정책 리더십 기반이 마련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여전히 소방청, 식약처, 환경부 등과 같은 타 분야 안전 행정조직과 비교할 때 본부조직의 공무원 수와 전문성 등 역량이 매우 취약하다. 국책 산업안전보건 전문 연구조직은 전무하다. 또한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수사지휘권과 기소권이 검찰에 있고 고용노동부가 검찰에 과잉 의존하는 관행이 있으므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마련된 안전보건 정책 리더십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검찰은 법 전문가일 뿐 안전보건에 관한 전문성이 없거나 일천한데, 사실상 안전보건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어서 우려된다.
요컨대 분산되어 가는 산업안전보건을 일원화화고, 안전보건에 관한 전문성을 축적하며, 고용노동부의 타행정 분야와 검찰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산업안전보건청 신설 등과 같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행정조직으로 개편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안전보건의 브레인 '연구소' 절실

▲2021년 7월 13일 당시 김부겸 국무총리가 세종시 반곡동 고용노동부 별관에서 열린 산업안전보건본부 출범식에 참석해 격려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안전보건 규제정책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나 현 고용노동부는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안전보건 정책 등을 고안하는 독립적인 연구소가 없기 때문이다. 안전보건 관리의 원칙에 입각한 전략적 예방감독에 관한 전문성을 축적하는 단위가 없다. 이로 인해 고용노동부는 '일관된 (규제) 정책'을 수행한 경험이 없으며 재해율·사망률 등과 같은 후행지표에 대한 즉흥적이고 근거 없는 해설이 정책평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안전보건본부 신설로 규제정책 전문성이 제고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연구단위가 없는 체제이다 보니 전문성의 '원시적 축적'을 기대하기 어렵다. 안전보건공단 안에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있으나 국책 연구원이 아니고 안전보건공단의 작은 소속기관에 불과하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규제정책에 관한 전문성이 없고 법적 근거가 없으므로 다른 안전보건 부문 연구를 중장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없고, 사고조사를 포함한 연구 결과를 독립적으로 발표하기도 어려운 구조이다. 또한 30년 이상 거의 증원 없이 약 40명에 불과한 연구 인력으로 버티면서 연구원이 아니라 연구용역 발주·관리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국가 지정 연구원이 아니므로 국가 연구개발(R&D)을 수행할 수 없으니 중장기 연구를 할 수 없어 1년 단위(실제 수행기간 6개월 미만) 단기 연구용역의 형태로 연구비를 집행하는 상황이다.
고용노동부 소속기관으로 있다가 1989년에 문을 닫은 '노동과학연구소' 재설치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 노동과학연구소는 안전보건 규제정책의 전문성 제고, 산업안전 감독관의 역량 강화, 유해·위험요인 위험성 평가 및 관리 역량 향상을 위한 최소한의 인프라였다.
환경부의 국립환경과학원·화학물질안전원, 행정안전부의 재난안전연구원, 식약처의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등은 해당 부처 소관의 안전기술 업무를 수행하는 책임행정 기관인 동시에 소관 법령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규제정책을 수립하고 평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1978년 국립환경연구소로 출범한 국립환경과학원은 수많은 부서가 있고 전국의 여러 연구소에 연구원이 약 800명 근무하고 있다. 이에 비해 비슷한 시기에 설립한 국립노동과학연구소는 약 12년간 존속하다가 없어졌다. 산업안전보건 행정조직의 전문성, 독립성 등 핵심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브레인에 해당하는 자체 연구소가 꼭 필요하다. 2020년 보건복지부로부터 독립한 질병관리청은 보건복지부 소속의 국립보건원을 소속기관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국립감염병연구소를 신설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가 쉽다.
중대재해의 예방을 산간오지를 찾아가는 여행에 비유하자면 중대재해처벌법은 고속도로, 산업안전보건법은 지방도로와 산길에 해당한다. 또한 고용노동부가 완행열차와 기관사라면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행정조직은 자가용 승용차와 운전자라고 볼 수 있고, 노동과학연구소는 내비게이션이다. 아무리 길이 좋아도 차와 내비게이션 없이는 원하는 장소에 갈 수 없다.
▲강태선 / 서울사이버대 안전관리학과 교수
강태선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강태선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농촌진흥청, 안전보건공단, 고용노동부 등에서 안전보건 연구자 또는 실무자로 일했고, 현재 서울사이버대에서 화학물질 관리, 물리적 유해인자 관리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된 관심 영역은 사업장 화학물질 보건안전 관리와 산업재해 조사입니다. 고용노동부 중대재해사고 백서 편찬위원과 한국산업보건학회 기획이사를 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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