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선수로의 모습
윤찬영
억지로 물길을 바꿔야 했던 만경강
일본은 만경강 물길도 바꿨다. 마치 뱀이 기어가듯 제멋대로 굽이쳐 흐르던 물길을 곧게 펴고, 물이 넘치지 않도록 물길을 따라 제방을 쌓아 올렸다. 왜 그랬을까.
190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에선 늘 쌀이 모자랐다. 그러자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들에서 더 많은 쌀을 빼앗아 오기로 하고, 이른바 '산미증산계획'을 세웠다. 1차 산미증산계획(1920~25년)에 따라 전북 지역에 더 많은 농토를 만들어야 했다. 이때만 해도 만경강의 주변엔 황무지가 많았는데, 구불구불한 물길을 곧게 펴고 강물이 넘치지 않게 둑을 쌓으면 어마어마한 땅을 농지로 바꿀 수 있었다.
어떤 곳에선 폭이 100m나 되는 새로운 물길을 3km에 걸쳐 파기도 했다. 둑을 쌓는 일도 만만치 않았는데, 높이 6~7m에 달하는 높은 둑을 강 양쪽으로 30km씩, 그러니까 모두 60km를 쌓아 올렸다. 하루 200mm의 비가 일주일 동안 쏟아져도 넘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둑의 폭도 7m로, 지금도 차 두 대가 거뜬히 지날 수 있다.
공사는 15년이나 걸려 1939년에야 끝났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1000억 원에 가까운 큰돈이 들어간 그야말로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이 어마어마한 공사에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됐다. 1925~35년 사이에만 316만 명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가운데 일본인은 14만 명, 나머지 302만 명은 모두 조선인으로, 대부분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굴착기 같은 중장비들도 쓰이긴 했지만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고선 모두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고 그렇게 퍼낸 흙을 지게로 지고 날랐다.
잔디를 떠다 입히고, 흙차를 밀어 올리고 그 흙을 부리는 일을 하던 조선인 (남성) 노동자들은 일급으로 70전씩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는 하루 세끼 밥값 45전에 막걸리 한 잔 10전을 치르고 나면 겨우 15전이 남는 돈이었다.
"동정의 눈물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채석장에서 노동하는 연약한 부녀자들이다. 방금 굴러 떨어질 듯한 석산 밑에서 잔돌을 부시는 것이 일인데 왼손에 돌을 쥐고 바른손엔 쇠망치로 부수노라니 손가락은 터졌다가 아물고 아물었다가 다시 터져 문자 그대로의 완부(손상되지 않은 완전한 피부)가 없다. 하루 종일 걸려야 반 마차밖에 못 부수니 수입이 겨우 20전 내지 25전이다... 언젠가는 산이 무너져 부녀 세 사람이 분골쇄신하는 대참사도 있었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29.5.5.
여전히 비참했던 조선인 농민의 삶
높은 산 중턱에 댐을 쌓아 물을 가두고, 거기서 군산 앞바다까지 긴 물길을 내고, 또 만경강 물길을 곧게 펴고 높다란 둑을 쌓고... 이러한 대공사 끝에 거대 일본인 농장주들은 더 많은 쌀을 생산해 일본으로 실어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선인은, 심지어 조합원이어도 마을을 지나는 대간선수로 물을 자기 논에 마음대로 댈 수 없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조선인 농민들이 물을 쓰지 못하게 막았다. 또 비싼 조합비를 버티지 못해 땅을 뺏기는 일도 흔했다. 그리하여 참다못한 조선 농민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떼로 몰려가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갑문을 부수는 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농민들이 겪어야 했던 설움과 아픔은 소설 <1938년 춘포>에 잘 담겨 있다.
"상답(上畓) 아래 수문을 쪼매만 열어달란 말 아닌갑네. 상답은 물을 웬만치 먹었응게, 인자 하답으로도 물을 보내야 허지 않겄소."
소작인들은 애가 달았다. 지금도 뜨거운 햇볕에 목을 축이지 못하고 말라 들어가고 있을 논을 생각하면 침 삼키는 것도 아까웠다.
"어제도 물을 내려보내지 않았소."
"내려보내믄 뭣 혀. 수문을 꽁꽁 닫아놓고 밑으로 좔조라 흘려뿌리더구만."
춘포에서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군산 옥구평야에 이르러 거대한 일본인 농장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도 물 때문에 성화였기 때문에 조합에서 물단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중략...)
"거 참, 답답허구만. 뻔히 눈에 보이는 물을 보고도 내비둬야 한다는 것이 될 일인가?"
▲춘포도정공장의 지금 모습 100년이나 된 건물의 뼈대는 그대로 남아있다.
윤찬영
지난번 글에도 썼지만 만경강 주변 춘포 농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인 농장주 호소카와는 1914년 2000㎡ 땅에 도정공장을 세우고 정미기를 12대나 들여왔는데, 가을이면 완주와 김제에서 실려 온 쌀들이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100년도 넘은 이 도정공장은 지금은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 옛날 정미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자리를 지금은 멋진 예술작품들이 채우고 있다.
▲도정공장은 최근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윤찬영
▲춘포 도정공장의 모습
윤찬영
다시, 김훈의 <자전거여행>이다.
"만경강은 아직도 파행하는 자유의 강이다. 큰 댐이 없고, 하구언(둑)이 없고, 시멘트 제방이 없고, 강변도로가 없고, 수중보가 없고, 강가에 갈비 먹는 집이 없어서, 마음대로 굽이치는 유역은 언제나 넓게 젖어 있다. 바다가 수평선 너머로 물러간 저녁 무렵의 하구에서, 강의 크나큰 자유는 아득한 갯벌 위에서 헐겁고 쓸쓸했다."
조금 보태자면, '만경강은 익산이라는 도시를 무척이나 닮아있다.' 그리하여, 만경강과 물길을 들여다보면, 익산이 보인다.
[참고한 글]
이종진, <만경강의 숨은 이야기>(2015)
신귀백, '익산근대농업의 상징, 대간선수로와 이리농림'. <(익산학연구총서①) [익산학 시민교재] 익산, 도시와 사람>(2019), 익산문화관광재단.
윤춘호, <봉인된 역사 - 대장촌의 일본인 지주와 조선 농민>(2017),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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