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3 09:17최종 업데이트 24.06.1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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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 의견을 피력할 때에는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혹은 '조선'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조선에 대한 인식은 달라도 윤석열 정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대화는 말 그대로 상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인데, 상대가 반감부터 갖게 되는 표현은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너진 남북관계와 위기에 처한 한반도 평화를 재설계하기 위해서는 적대성의 완화와 대화 재개가 필수적입니다. 서로 '제 이름 부르기'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구합니다. [기자말]
1971년 9월 30일 체결된 미국과 소련 간의 핵전쟁 발발 위험을 줄이기 위한 조치에 관한 협정미 국무부
 
"아무리 정교한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기술적인 오작동이나 인간의 실책, 그리고 허가받지 않은 행동이 핵 재앙이나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체제 경쟁과 군비경쟁에 여념이 없던 미국과 소련이 1971년 우발적 핵전쟁을 막기 위해 체결한 협정 서문에 담긴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핵전쟁을 억제하겠다'며 취해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아래 조선)의 행보가 오히려 우발적인 핵전쟁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우려를 나누고자 하는 데 있다. 조선이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취하는 언행이 과비유환은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취지이다.


물론 이는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이나 미국, 혹은 한미동맹의 군사적 준비태세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책결정자들이 이 글을 접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기를 희망하면서 몇 마디 적는다.

KAL기 피격 사건과 하와이 소동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 이후 의도적인 핵무기 사용은 지금까지 없었다. 하지만 핵 시대가 개막된 이후 핵전쟁의 문을 두드린 의도치 않은 우발적인 사고들은 많이 있었다. 조선은 이로부터 교훈을 찾아야 한다.

영국의 BBC는 2020년 8월 10일 자 분석 기사에서 핵무기의 등장 이후 우발적인 핵전쟁이 벌어질 뻔한 사례가 최소한 22차례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월출이나 햇빛과 같은 자연 현상, 날아다니는 새떼를 핵 공격으로 오인하기도 했고, 인공위성 발사 정보를 제대로 접수하지 못해 핵 가방을 가동할 뻔한 적도 있었다. 조선도 잘 알고 있을 법한 사고도 있다.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가 종말을 고하고 신냉전으로 돌입했던 1983년. 그해 9월 1일에 미국 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보잉 747 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추락해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소련의 방공 부대가 한국 여객기를 미국 정찰기로 오인한 것에서 비롯된 참극이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미소 간의 신경전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9월 26일, 소련의 조기 경보 위성은 미국이 5기의 지상 발사 미사일을 소련을 향해 발사한 것으로 탐지했다. 이를 접한 소련 장교에게 정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시간은 불과 몇 분밖에 없었다. 진짜 미사일 공격이라고 상부에 보고하면 소련도 즉각적인 핵 보복 태세로 진입할 터였다.

그런데 이 장교는 미국이 소련에 미사일 공격을 가할 경우 5개보다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5기의 핵미사일로는 소련의 보복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해 그는 상부에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악의 핵전쟁 위험이 지나갔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햇빛이 구름에 반사된 것을 소련 위성이 미국의 미사일 발사로 착각한 것이다.

조선과 미국 사이에 신경전이 절정에 달했던 2018년 초에도 황당한 일이 벌어졌었다. 그해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신의 직무실 책상에 "핵 단추가 있다"고 주장하자,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자신의 책상 위에는 "훨씬 크고 강력한 핵 버튼이 있고 심지어 작동도 한다"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현지 시간으로 1월 13일 오전 8시 7분. 주민과 관광객들의 휴대폰에 "탄도미사일이 하와이를 위협하고 있다. 즉각 대피하라. 이건 훈련이 아니다"라는 긴급 문자가 전송됐다. 한 달여 전에 하와이 주민들은 조선의 핵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대피 훈련을 받았던 터였다. 그래서 이번엔 실제로 조선의 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잘못된 경보였다. 작업 교대하던 하와이 주정부 비상관리국 직원이 '비상 버튼'을 잘못 누른 것이다.

'화산'과 '핵방아쇠'
 
2023년 3월 28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기연구소로부터 핵무기발전방향과 전략적방침에 따라 공화국핵무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최근 년간의 사업정형과 생산실태"에 대해 보고받았다고 보도했다.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핵 무력이 전쟁을 억제해 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김정은 정권은 최근 준비태세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화산'과 '핵방아쇠'는 이를 상징하는 표현들이다. 조선은 2023년 3월에 '화산-31' 핵탄두 사진을 공개하면서 "각이한 무기체계들과의 호환성"을 강조한 바 있다.

또 국가 최대핵위기사태에 해당하는 경보를 '화산 경보'라고 부른다. 그리고 화산 경보가 발령되면 핵반격태세로 전환하겠다고 한다. 아울러 국가핵무기종합관리체계(핵지휘통제체계를 의미함)를 '핵방아쇠'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적대 세력의 핵무기 등을 이용한 주요 공격이 가해지거나 임박했을 때 신속하게 핵 보복을 가할 수 있는 '경보 즉시 발사'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자신한다.

'경보 즉시 발사'를 다른 말로는 '일촉즉발'이라고 부른다. 언제든 발사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또 '화산'은 핵폭발 시 만들어지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연상시킨다. 조선이 '핵방아쇠'와 '화산'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도 이러한 핵무기의 특성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상대에게 최대의 공포를 안겨줘 자신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말라는 엄포이다.

하지만 조선이 핵무력을 질량으로 강화하고 신속한 핵반격태세 구축의 유혹에 빠져들수록 핵전쟁의 위험은 자신으로부터도 도래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경보 체계 발령 과정에서 인간도, 기계도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기계의 오작동과 인간의 오판과 오인이 핵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교훈은 군사과학기술 강대국이라는 미국과 소련(러시아)에서도 숱하게 발생해왔다.

한미동맹과 조선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는 더하다. 휴전선을 맞대고 있어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국지 충돌이 언제든 발생할 위험이 있고 이런 상황의 발생 시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조선이 국지 충돌 과정에서 쏜 미사일이나 포탄에 핵탄두가 장착되어 있는지는 탄두가 폭발한 이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이 평소에 유사시에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강하게 내뿜을수록 한미동맹은 발사체에 핵탄두가 장착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대응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금까지 조선은 미국과 러시아 등 핵보유국의 공세적인 핵 독트린을 학습해 이를 자신의 핵 정책에 반영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우발적인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사례들도 면밀히 살펴보고 이로부터 교훈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

끝으로 조선 지도부에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1999년에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와 "우리는 조선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조선은 미국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고 여긴다"며 역지사지의 태도를 강조한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의 말이다. 그는 하와이 소동을 접하고는 트위터(현 엑스)에 이런 글을 남겼다. 미국을 향한 말이지만 조선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우발적인 핵전쟁은 가상적인 상황만은 아니다.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고, 사람은 또다시 실수할 수 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만큼, 우리는 실수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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