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북진 진전도
봉주영
한편 이승만은 유엔군의 38선 돌파 여부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해 초조했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대단히 강경한 북진통일론자였다. 서울에서 환도식이 열린 9월 29일 미8군 사령관 워커는 기자들에게 '진격은 38선까지'라고 말했다. 이날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자신은 북진할 권한이 없다고 하자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북진하겠다고 언명했다. 이승만은 이날 오후 대구 육군본부로 가서 한국군 장성들을 모아놓고 직접 북진 명령서를 하달했다.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참모총장 정일권은 미8군 사령관 워커에게 38선 돌파에 적절한 구실을 내밀었다. 국군 3사단이 38선 이북의 인민군 고지로부터 피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고지를 공격하겠다고 건의한 것이다. 정일권은 전선의 군인답게 정치적 이슈를 전술적 이유로 치환시켰고 워커는 전술적인 이유로 흔쾌히 승낙했다. 정일권은 9월 30일 강릉으로 가서 1군단에게 38선 돌파를 지시했다. 1군단 작전명령103호, 3사단 작전명령 44호가 그것이다.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38선 이북으로 돌아간 병력은 2만 5천 내지 3만 정도로 추정됐다. 낙동강 전선에 집중됐던 7만 5천의 반도 되지 않는 숫자였다. 전선의 조직은 크게 약화됐고, 보급은 두절된 상태에서 인민군 병사들은 거의 전의를 상실했다.
드디어 38선을 돌파해 북진이 시작됐다. 남침이 전면전이었던 만큼 북진이란 반작용은 더더욱 강력했다. 내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6.25의 노래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조국을 짓밟은 오랑캐 원수들에게 피의 원한을 푼다'는 기세였을 것이다.
38선 서부에서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동부에서는 북한의 산업과 물류의 중심지인 원산이 가장 큰 목표였다. 이때 유엔군의 북진 한계선은 정주-영원-함흥(소위 맥아더선)이었다.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동해안의 국군 1군단 3사단이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했다. 양양의 7번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경미한 저항을 제압하며 양양에 돌입한 것이 10월 1일이다. 5일 고성에서 격전이 있었다. 통천에서도 몇 차례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는 패천 쌍음을 거쳐 원산을 공격할 지점에 이르렀다. 하루 평균 24킬로미터의 속도로 북진한 것이다.
1군단의 수도사단은 1개 연대는 양양에서 인제-양구-말휘리-화천-도납리-황룡산-안변으로, 2개 연대는 간성-고성-통천까지 동해안으로 북진하다가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화천-회양-신고산-안변으로 진격했다. 수도사단은 산악지대로 들어간 인민군을 소탕하며 북진했다. 신고산에서는 전차 6대를 포함해 상당량의 인민군 보급품을 탈취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안변에서 3개 연대가 다시 집결한 수도사단은 곧바로 원산 공격을 준비했다.
10월 10일 3사단과 수도사단이 동시에 원산을 공격했다. 두 개 사단 사이에 북진경쟁이 치열해 지경선을 침범하는 일도 있었다. 공격을 시작하고 혼전 끝에 원산 중심부를 점령했다. 12일에는 원산 비행장도 장악해 유엔군 수송기가 착륙할 수 있었다.
원산을 함락시킨 뉴스에 많은 사람들이 고무됐다. 이승만은 원산을 몸소 방문해 38선을 제일 먼저 돌파한 공을 치하하고 1군단 전장병을 일계급씩 특진시켰다.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주장대로 북한군을 격멸하고 북진통일을 곧 이룰 것 같은 분위기였다. 원산의 성공이었다.
중부지역은 국군 2군단의 6, 7, 8사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중부의 38선 중심은 춘천이었다. 6월 25일 새벽 모진교 남쪽 고지가 인민군의 포격에 파괴되면서 기습공격을 당했던 국군 6사단이 10월 5일 바로 그 모진교를 건너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6사단은 인민군의 저항을 격파하고 화천까지 거침없이 진격했다. 화천-김화 다음에 금성-신안-회양-신고산까지 진출한 다음 평양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덕을 거쳐 10월 19일 성천까지 진격했다. 성천은 평양의 북동쪽 뒷덜미였다. 북한의 수도를 바로 타격할 수 있는 곳이었다.
8사단은 한탄철교 남단의 초성리에서 38선을 돌파해 연천-철원-평강 다음에 이천-곡산-수안-율리를 거쳐 10월 18일 평양의 동쪽 관자놀이를 직접 겨눌 수 있는 삼등까지 진출했다. 예비대인 7사단은 포천 양문리를 출발해 김화를 거쳐 8사단의 후미를 따라 북진했다.
서부지역은 개성-사리원-평양으로 이어지는 북진의 주전장이었다. 미8군은 개성 금천 사리원을 돌파해 평양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개성-평양 축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다소 지체되기도 했지만 대세는 유엔군이었다.
원산의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