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노동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1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합병 사건에 대해 공정하고 엄정한 판결을 촉구했다.
유성호
마지막 논거는 이번 재판에서 무죄의 근거로 제시된 삼성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과 관련 있다. 이 회장이 이번 재판에서 무죄를 받으려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계 부정에 관여한 수많은 삼성 내부인이 총수의 제1의 관심사인 삼성그룹의 지배권 승계 문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개별 회사만을 위해 의사결정을 했는데, 그것이 우연히도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회계 부정 수사에 대비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공장 바닥에 서버를 숨기는 행위는 '상부의 지시 없이 그저 실무자들이 알아서 한 일'이며, 에버랜드의 사업 분할 양도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같은 사업 재편 프로젝트는 그룹 전체의 사업 재편 결과라는 궤변을 수긍해야 한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한국 최대 재벌가문의 경영권 승계가 이와 같은 '우연의 힘'에 의해 이뤄졌다는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재용 회장뿐 아니라 함께 재판에 넘겨진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실장, 김종중 전 전략팀장, 장충기 전 차장 등 나머지 13명의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1500페이지가 넘는 판결문에 대한 법리적 비판은 법률가에게 맡기고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판결의 문제점을 몇 가지만 간략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기업범죄 관련 판결문을 살펴보면 판사가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그에 맞는 근거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듯이 보이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로 전과가 있는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해 판사가 범죄 전력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예컨대 판사는 "동종 전과 없음" 혹은 "벌금형 전과 외에는 없음"이라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또 다른 심각한 사례로는 국정농단 뇌물사건에서 이재용 회장을 피해자로 변신시킨 정형식 당시 부장판사의 항소심 판결을 들 수 있다. 이 판결문을 읽어보면 정 판사가 이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정 판사는 온갖 억지스러운 논리와 궤변을 동원했다. 먼저 이 회장의 뇌물 및 횡령 금액을 50억 원 이하로 대폭 낮췄고, 뇌물죄의 구성요건인 '부정한 청탁'을 부정하기 위해 삼성의 각종 로비가 지배력 강화에는 도움이 됐지만 "부정한 청탁 대상으로서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이번 1심 판결에 비하면 이 판결은 그나마 양반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유일한 목적이 이 회장의 지배권 승계나 강화라고 단정짓기 어렵다는 재판부의 판단에 있다. 이는 합병에 경영권 승계 외에도 삼성그룹 고유의 사업적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 회장 등 피고인들의 배임 의도를 부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행위의 목적은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추론하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19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으로 시작된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프로젝트 어느 것도 지배권 승계나 지배력 강화가 유일한 목적이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회사법 어디에도 전환사채의 발행이나 기업의 합병이 지배권을 위한 시도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른 사건들에서는 문제가 된 행위에 범죄 외의 목적이 있다고 해도 쉽게 범죄의 고의를 인정하면서 왜 유독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에서는 이러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재판부는 합병이 삼성물산과 그 주주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 역시 납득할 수 없다. 합병으로 인해 설사 시너지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삼성물산의 주주 입장에서 불공정한 합병 비율은 그 자체로 손해를 발생시킨다. 실제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부는 합병 비율이 불공정해서 투자자들이 손해를 봤다면서 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메이슨 캐피탈에 각각 1300억 원과 438억 원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판정을 내놓고 있다. 이것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주주들에게 실질적인 손실을 야기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주주 지배력 강화가 주주들에게 이익?

▲윤석열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이 2023년 12월 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떡볶이 등을 먹고 있다. 왼쪽 두번째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마지막으로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가 주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논리도 동의할 수 없다. 대주주와 소수주주의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회사에서 주주와 경영진의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영진이 주주의 이익을 희생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배임죄가 되는 것처럼, 지배주주가 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소수주주의 이익을 희생하는 행위 또한 배임죄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배주주의 지배력 강화가 항상 회사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배의 사적 편익을 매우 많이 누리고 있는 지배주주는 소수주주에게는 물론 회사에 해로운 행위조차 지배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학계의 연구들은 그룹에 대한 총수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 지주회사를 설립하거나 총수의 지분이 많은 기업에 일감을 몰아주는 결정이 재벌 내부의 자원 배분 효율성을 훼손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조덕상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5년 사이 기업 간 자원배분 효율성은 연평균 1.9%p 감소했고, 그 원인의 80%는 재벌 계열사의 자원배분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이의 상당 부분은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업집단 내에서 인적·물적 자원이 재배치된 결과이다. 따라서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를 통해 경영권이 안정되는 것이 주주들에게 항상 이익이 된다는 법원의 판단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지난 30년간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전자제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성장을 했고 전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이 됐다. 하지만 이런 사업적 성공과는 달리 삼성의 지배구조는 오랜 기간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회장으로 승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법적 문제들은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2005년의 X파일 사건, 2007년의 김용철 변호사 양심고백, 2015년의 엘리엇 사태, 2017년의 국정농단 수사에서 보듯 삼성을 단죄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검찰과 법원이 처음엔 기세등등하게 나섰지만 결국 '삼성 봐주기' 논란에 휩싸여 사법정의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무죄 판결은 삼성과 관련된 지난 30년간의 판결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평가내릴 수 있을 만큼 문제투성이다. 항소법원은 이 판결의 문제점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 바로잡아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함으로써 무너진 사법신뢰를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최한수 /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최한수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최한수는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입니다. 경제개혁연구소 자문위원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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