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5 11:28최종 업데이트 24.04.15 11:28
  • 본문듣기
2021년 1월 20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DC의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독일사를 전공한 친구에게 독일 정당 이름에 기독교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독일의 '기독교 민주주의당'이 정치-종교 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근대 정치와 어긋나 보여 그 배경이 궁금했다. 친구는 독일의 교회세를 설명하며 독일 역사에서 종교와 국가가 제도적으로 완벽히 분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 영역에서 독일 정치인들이 종교적 믿음을 앞세우지는 않는다고 했다.

국가와 종교의 교차는 미국에서도 보인다.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한다. 부활절이 되면 백악관은 수만 개의 계란을 준비하고 대중들은 백악관 잔디밭에서 계란 굴리기 행사를 한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영부인이 주도한 백악관 크리스마스트리를 공개한다. 문화와 전통의 연장선일 뿐 여기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기독교-국가 관계를 주시해야 할 일이 일어났다. 올해 부활절인 3월 마지막 주에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느닷없이 성경 판매를 선언했다. 가격은 59.99달러(약 8만 2000원)다.
 
지난 3월 26일(현지시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성경 구매 촉구 동영상을 자신의 트루스 소셜 계정에 올렸다. 트루스 소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경이 아니다. 표지에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the USA)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새겨져 있고 아래에는 미국 국기 문양이 그려져 있다. 국가, 인종, 이념을 떠나 보편적이고 통합의 가치를 추구하는 성경에 국가를 넣은 셈이다.

긴장 풀린 국가-종교 관계는 성경 표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성경에는 미국 정치의 근간이 되는 미국 헌법, 권리 장전, 독립 선언서, 국기에 대한 맹세도 들어있다. 또한 공화당이 비공식 당가인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의 원곡자 리 그린우드가 쓴 가사도 수록되어 있다.


트럼프는 성경 판매의 배경으로 "미국을 다시 기도하게"(Make America Pray Again)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트럼프의 대표적 정치 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에 맞춰 기독교 민족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민족주의와 트럼프

통념을 뒤엎는 국가-종교 관계 재설정을 미국 사회가 수용하는 건 아니다. 퓨리서치센터가 3월 15일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인의 83%가 기독교를 미국 공식 종교로 선언하는 데 반대하고 종교-국가 분리 원칙을 지지했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는 아니더라도 연방 정부가 기독교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49%('대단히'가 23%, '어느 정도'가 26%)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성경이 미국법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28%의 응답자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이들 중 42%는 성경과 법이 충돌했을 때 성경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은 대부분 복음주의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와 남미계 기독교다. 남미계가 이주자 문제로 트럼프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고려했을 때 트럼프의 성경 판매는 이들에게 호소하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남미계 기독교는 복음주의 기독교만큼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 지난 2월 27일 발표한 공공종교연구소(PRRI)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3명이 기독교 민족주의를 지지 혹은 동조한다고 답했다. 전체로 보면 낮지만 복음주의 기독교의 66%와 남미계 기독교의 55%가 지지를 밝혔다. 

기독교 민족주의의 절반가량('지지한다' 54%, '동조한다' 45%)이 "권력을 잡은 엘리트들을 쓸어버리고 의로운 지도자를 세울 폭풍이 오고 있다"는데 동의했다. 사회를 1%의 엘리트와 99%의 대중으로 파악하는 포퓰리즘과 국가 부흥, 그리고 이를 실천한 강력한 지도자를 지지하는 대목이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정치 폭력에 대한 용인도가 높다. 위 PRRI 조사에서 "미국 사회가 선로를 벗어난 상황에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진정한 애국주의자들은 폭력에 의존해야 할지도 모른다"에 기독교 민족주의 지지자의 38%와 동조자의 33%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이 수치는 조사 속 여타 미국인에 비해 2배 높은 수치이다.
 
2020년 6월 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건너편 세인트존스교회 앞에서 성경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20년 경찰 폭력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 당시 트럼프는 정치 폭력과 성경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드러낸 적이 있다. 당시 백악관 근처에서 집회를 최루가스로 강제 해산시킨 후 등장한 트럼프는 성경을 들고 백악관 건너편에 위치한 세인트존스교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 자리에서 국가 폭력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으며 "우리는 위대한 국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올해 부활절은 공교롭게도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Transgender Day of Visibility)과 겹쳤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알려진 바이든은 2021년부터 해마다 트랜스젠더의 날 선포문(proclamation)을 발표했는데 올해도 선포문을 통해 트랜스젠더 미국인들의 용기와 공헌에 존경을 표하고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며 목소리를 높이고 성 정체성에 따른 폭력과 차별이 근절될 수 있도록 모든 미국인이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자 트럼프 캠프의 캐롤라인 래빗 대변인은 "부활절에 트랜스젠더의 날을 선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며 백악관이 미국 전역의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화당의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도 바이든이 "부활절의 주요 교리를 배신했다"고 혹평했다.

트럼프의 성경 판매에 담긴 의미

트럼프의 성경 판매에는 파시즘적 속성이 보인다. "다시 기도하게"와 "다시 위대하게"에서 보이는 복고적 국가 부흥 논리,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표방하는 반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민주주의적 지도자보다는 강력한 카리스마 지도자 선호, 정치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사법, 자아(미국)에 대한 우월과 타자(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파시즘을 구성하는 주요 특성이다.

여기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나오고 있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트럼프에게 보이는 파시즘의 성격을 분석했다. CBS의 토크쇼 진행자 스티븐 콜베어는 트럼프를 파시스트라 불렀고, NBC의 토크쇼 진행자 세스 마이어 역시 트럼프의 언어가 '노골적인 파시스트 수사법'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파시즘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들고 성조기에 싸여 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성경 판매 발표 후 ABC의 간판 토크쇼 <더 뷰>의 조이 베이하가 들고 나온 말이다. 1930년대 유럽이 파시즘에 휩싸였을 때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에서 파시즘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나오자 미국 지식인들이 미국에서는 애국주의와 기독교가 구심점이 될 것으로 예측하면서 나온 문구다. 미 대선에서 트럼프의 기독교 활용 방식을 주의 깊게 봐야 할 이유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프리미엄 권신영의 애틀랜틱 월드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