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0 08:47최종 업데이트 24.06.1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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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새로 개발한 극초음속 활공비행 전투부를 장착한 새형의 중장거리 고체탄도 미사일 '화성포-16나' 형의 첫 시험발사를 지난 2일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3일 보도했다. 통신은 이날 신형 중장거리 고체연료 극초음속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책임 소재를 두고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줄곧 대북정책의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라고 해왔지만, 정작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이른바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30여 년간의 북미관계의 동학을 살펴보면 주목할 만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딥 스테이트(deep state)', 즉 '국가 안에 국가'를 만들어 미국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군산복합체가 북핵 문제에 미친 영향이 바로 그것이다.


냉전 종식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몰락, 중국의 체제 전환과 한소·한중 수교 등이 맞물리면서 북한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몰렸다. 반면 북한이 "철천지 원수"로 불렀던 미국은 제국의 지위에 올라섰다. 북한도 대전환을 모색했다. 제국의 지위에 올라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최대 목표로 삼은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북한의 비밀 핵 개발설이 불거졌다. 특히 국방부와 중앙정보국(CIA) 등 미국 강경파들이 앞장서 북한이 이미 몇 개의 핵무기를 개발했거나 다량의 플루토늄을 확보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로 인해 '역설의 공간'이 열렸다. 당시 미국은 핵 비확산을 최대 외교 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었는데, 이에 도전장을 낸 북한에 미국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제국의 뜻에 도전해 제국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북한은 제국의 뜻을 수용하는 대가로 "조미 적대관계의 평화로운 관계로의 전환"을 도모했다. 이것이 총체적인 위기에 처한 북한이 살 길이라고 믿었다. 17개월간의 협상을 통해 1994년 10월 체결된 북미 기본합의(제네바 합의)는 핵 비확산을 중시한 빌 클린턴 행정부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갈망한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타협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
 

2018년 2월 23일 북한 조선중앙TV가 방영한 새 기록영화 <어머니당의 품> 제5부에서 북한의 강석주 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서명하는 모습. ⓒ 연합뉴스


냉전 종식으로 위기에 처한 세력이 또 있었다.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냉전은 종식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승리한 것"이라며 샴페인을 터트렸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세력이 미국 내부에 존재했다. 냉전을 먹잇감 삼아 거대한 괴물이 되었던 미국의 군산복합체다.

실제로 1990년대 들어 미국 군수산업계엔 구조조정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고 국방비는 1980년대 중후반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위기에 처한 군산복합체는 북한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로 인해 위기에 처한 두 세력, 즉 북한과 미국 군산복합체의 상호작용이 한반도 문제의 보이지 않는 핵심에 똬리를 틀었다. 위기에 처한 북한은 미국과 친해지려 했지만, 위기에 처한 군산복합체는 '북한위협론'을 필요로 했다.

이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 것이 제네바 합의와 미국 중간 선거의 조우였다. 군산복합체는 공화당을 상대로 치밀한 로비를 가해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정강 정책의 외교안보정책 1순위로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북한 등 "깡패 국가(rogue state)"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이러한 정강 정책 발표 직후 제네바 합의 타결 소식이 전해졌다. 2주 후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은 이 합의의 이행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200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군산복합체가 긴장할 상황이 또다시 등장했다. 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북한과 미국의 특사를 교환해 '북미공동코뮤니케'를 채택했다.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도 방북을 약속했다.

그런데 11월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승리하면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 성과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팀의 대다수는 군수산업체 및 이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싱크탱크 인사들로 채워졌고 이들은 MD를 최우선 과제로 삼으면서 북한위협론을 최대 구실로 내세웠다.

이 와중에 9·11 테러,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 등이 벌어지면서 2000년대 중후반 미국의 국방비는 1990년대의 두 배 수준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군산복합체의 영향력이 또다시 강해지면서 민주당 정권인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 행정부도 이들의 눈치를 보거나 영합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미국 대외정책의 '군사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공화당 정권의 MD에 비판적이었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이를 계승한 것이나, 임기 첫해에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바마가 임기 말에는 1조 달러에 달하는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을 승인한 것, 그리고 최근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및 이스라엘에 군사 원조를 늘리면서 '미국인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화법을 동원하는 것 등에서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젠하워의 경고
 

2022년 12월 20일 한반도 인근에 전개한 미국 B-52H, F-22, C-17이 비행하고 있다. ⓒ 국방부

 
대북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에 대북정책을 가둬두고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과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사상 최초로 북한과 정상회담에 나섰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한국에 무기를 더 많이 팔고 방위비 분담금을 올려 받겠다는 유혹에 빠졌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외교보다는 억제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억제력 강화는 군비증강과 같은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미국의 북핵 문제에 대한 접근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공식적인 목표와 '북한위협론'을 필요로 했던 군산복합체의 잇속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이 사이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증강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국제정세에 만만치 않은 행위자로 등장하고 있다.

미국은 북러 밀착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동북아의 세력균형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또 미중 대결의 최전선으로 불리는 대만의 유사시에 '북한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도 미국의 고민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에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북한이 머지않아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핵미사일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이 씨가 되고 말았다. '북한위협론'을 활용하고자 즐겨 쓴 표현인데,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된 셈이다.

이러한 현실을 놓고 보면, 군산복합체를 유행어로 만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경고가 절로 떠오른다. 그는 1961년 대통령 퇴임사에서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정책 결정을 왜곡시킬 정도로 비대해졌다며 이들의 부당한 영향력을 막는 것이 후임자들의 최대 숙제 가운데 하나라고 역설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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