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활란 ⓒ 위키미디어 공용
경기도 수원정에 출마한 민주당 김준혁 국회의원 후보자가 초대 이화여대 총장인 김활란에 관해 언급한 것이 논란을 일으켰다. 김 후보는 2022년 8월 '김용민 TV'에서 "전쟁에 임해서 나라에 보답한다며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김활란"이라며 "미군정 시기에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 장교에게 성상납시키고 그랬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이 발언이 이번 선거기간에 불거지자, 이화여대가 즉각 사퇴를 요구하고 국민의힘이 비판을 가했다. 김 후보는 처음에는 "앞뒤 다 자르고 성과 관련된 자극적인 부분만 편집해 저와 민주당 전체를 매도하고 있다"며 맞서다가, 결국 민주당의 권고를 받아들여 2일 사과했다. "과거의 발언이 너무나 경솔했음을 진심으로 반성한다"며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밝혔다.
김활란과 낙랑클럽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 겸 이사장인 김활란이 1942년 1월 대중잡지인 <삼천리> 제14권 제1호에 기고한 '불요불굴의 정신 함양'이란 글이 있다. 이 글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4권에 인용돼 있다.
세례명 헬렌의 한자 표기인 '활란'에 '천성'이라는 창씨를 덧붙여 천성활란(天城活蘭)이란 이름으로 기고된 이 글에서 김활란은 자신이 이화여전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소개했다. 그는 "여성의 입장에서 결전체제에 필요한 것은 직격(直擊)하게 시키고 있습니다"라며 "무엇이라도 시키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생 군사교련과 관련해 "필요타고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활란 편은 그가 1941년과 이듬해에 발표한 언론 기고문들을 열거하는 대목에서 "일반 여성과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해 헌신할 것을 주장했다"고 설명한다. 또 1938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그해 6월 '총후(銃後)조국을 내조한다'는 취지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 학생 400명으로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다"고 알려준다.
이처럼 김활란이 이화여전 학생들을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내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준혁 후보가 말한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
김준혁 후보에 대한 비판은 종군위안부 부분보다는 '미군 성상납' 부분과 좀 더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 보인다. 후자에 대해 그가 사과하기는 했지만, 이로써 이 문제가 종식되는 것은 아니다.
해방 4년 뒤 발행된 1949년 5월 20일 자 <자유신문> 2면 중상단에 '윌리엄씨 환영회 금일 인정전에서 거행'이란 기사가 실렸다. 한국 독립을 도운 외국인들을 위해 낙랑클럽이 20일 저녁 창덕궁 인정전에서 환영회를 연다는 기사다. 비슷한 내용이 그해 8월 7일자 <경향신문> 2면 좌하단에도 실렸다. 이 기사는 "낙랑여성클럽과 재경 외국부인클럽 주최"로 "내외빈을 위로"하는 행사가 전날 덕수궁 마당에서 열렸다고 전했다.
이런 기사들에 거론된 낙랑클럽(낙랑구락부)과 관련해 2016년에 발간된 최종고 서울대 교수의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은 낙랑클럽(The Nang Nang club)과 관련해 "언제 어떻게 결성되었는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미 국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948년 혹은 1949년부터 있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총재는 김활란이고 모윤숙이 회장으로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주로 이화여대 출신으로 영어를 잘하는 미모의 여성 150명 정도라고 되어 있다."
이 클럽의 배후는 이승만이었다. 위 책은 미국인들이 몰려오던 해방 이후 상황을 언급하면서 "한국 여성들이 외국인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한국 문화가 고급 문화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라며 "여기에 착상을 한 인물이 역시 이승만이었고,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도 동의"했다고 언급한다.
위 책에 따르면, 1979년 4월 12일 자 국내 일간지 인터뷰에서 모윤숙은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외국 손님 접대할 때 기생파티 열지 말고 레이디들이 모여 격조 높게 대화하고 한국을 잘 소개하라'고 분부하지 않겠나"라며 "우리는 부랴부랴 낙랑구락부를 조직"했다고 말했다.
낙랑클럽이 이승만이나 대통령실 차원에서만 운영됐던 것은 아니다. 위 책은 "운영비는 장면 총리실에서 부담해 주었다"라고 말한다. 1960년 4·19혁명 뒤에 의원내각제 총리가 된 장면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도 총리에 임명됐다. 이 시절의 장면 총리실도 관련됐으니 낙랑클럽이 정부 차원에서 운영됐다고 볼 수도 있다.
방첩대 문서의 폭로
▲ <중앙일보> 1995년 1월 18일 자 기사 '이승만정부 외교사절, 미군 등에 낙랑클럽 이용 정보 빼냈다' ⓒ 중앙일보 홈페이지 캡처
이 클럽은 미군 방첩대의 표적이 됐다. 클럽의 접촉 대상들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1995년 1월 18일자 <중앙일보> '이승만정부 외교사절, 미군 등에 낙랑클럽 이용 정보 빼냈다'에 인용된 미 방첩대 문서에 따르면, 낙랑클럽이 상대한 사람들 중에는 존 덜레스 국무장관,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8군 사령관 등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이들에 대한 접대를 통해 미국의 고급 정보를 빼냈다는 것이 미 방첩대 문서의 지적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 이승만 정권이 동원한 방식은 "기생파티 열지 말고 레이디들이 모여 격조 높게 대화"하라는 이승만의 지시와는 동떨어졌다. 방첩대 문서는 이렇게 폭로한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모 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 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 있는 호스티스였다. (중략) 외국인 접대행위는 몇몇의 경우 외국인의 정부가 되는 일로 발전되기도 했다. 실례로, 낙랑클럽 조직 구성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부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 노릇을 했다."
이런 활동은 미국 언론에도 보도됐다. 방첩대 문서에 따르면 1952년 12월 24일 자 미국 <데일리 팔로 알토 타임스>는 이 클럽 여성들이 '낙랑걸'이나 '마타하리' 등으로 불린다면서 이들을 "자유당의 접대부"로 표현했다. 그런 뒤, 이 클럽의 활동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사령부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사전에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1952년에 미국에서까지 보도된 낙랑클럽은 정작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위의 1979년 인터뷰에서 모윤숙은 일간지 기자를 상대로 "낙랑구락부는 어찌 알고 물어"라고 반응했다. 일간지 기자가 이 클럽을 아는 것이 뜻밖의 일로 비칠 정도로 그 존재가 오래도록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절에 발간된 어느 서적에는 낙랑클럽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은 채 김활란의 특이 활동이 소개됐다. 최종고 교수의 책은 이 서적의 내용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화여대 출신 언론인 2인이 저술한 <한가람 봄바람에: 이화 100년 야사>(지인사, 1981)에 보면, 낙랑클럽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부산 피란 시절 김활란 총장이 적산가옥을 사서 필승각(Victory House)으로 운영하며 주한 외국인을 위한 파티를 열기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김활란은 낙랑클럽의 외국인 대접을 통해 이승만 정부의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물론 클럽을 실질적으로 운영한 것은 모윤숙이지만, 김활란이 이 단체를 이끌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