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조망
윤태옥
크든 작든 산의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게 좋다. 전쟁에서는 사방을 내려다보면서 제어할 수 있다. 이를 감제(瞰制)라고 한다. 이런 지점을 차지하는 것이 군사작전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서울의 연세대학교 옆에 있는 안산이 바로 그런 곳이다.
안산은 해발 295미터밖에 안 되지만 그곳에서는 경복궁과 육조거리, 그리고 남산까지도 빤히 보인다. 북악산과 청와대도 걸어서 3킬로미터 안쪽이다. 시선만으로도 권력의 좌표를 감제할 수 있다고나 할까. 서북 방면에서는 안산 아래의 무악재를 넘으면 바로 서울의 중심이다.
안산에서 시선을 돌려 연세대학교로 내려가면 무악정을 거쳐 외솔관과 대운동장 쪽으로 야트막한 능선이 이어진다. 능선은 연세대 서문에서 서남 방향으로 이어진 조그만 야산을 이루고는 성산로로 내려선다. 한국전쟁의 서울탈환 전투에 등장하는 연희 56고지가 바로 그 조그만 야산이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전투를 끝내고 보니 1500여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던 전투의 현장이다.
서울 방어의 최후 보루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에 해안교두보를 확보한 미해병 1사단은 곧이어 한강으로 진격했다. 김포비행장과 영등포 두 곳이 목표였다.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가 거대한 기습을 당하고는 당황했다. 중국은 이미 정보분석을 통해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고 북한에게 두 차례나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낙동강 전선에만 마지막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최용건 서해지구방어사령관은 약 2만에 달하는 수도권의 병력을 집결시켜 수도 서울의 방어에 나섰다.
미해병 5연대는 김포비행장으로 향했다. 충분한 방어대책이 부족했던 인민군은 황급히 철수했다. 얼마 후 역습을 해왔으나 이를 격퇴하고 18일 새벽에는 비행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국 해병대는 김포반도로 진공해서 21일까지 인민군 잔적을 소탕했다. 20일부터는 유엔군의 거의 모든 항공기가 김포비행장에서 발진할 수 있게 됐다. 이미 제공권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었지만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이 훨씬 강해진 셈이다.
소사를 거쳐 경인가도를 따라 공격하던 미해병 1연대는 5연대보다 고전했다. 육상교통으로는 영등포역이 핵심이었고 서울 쟁탈을 위한 빗장이 걸린 곳이었다. 유엔군의 공격과 인민군의 방어가 치열했다. 미군은 19일 저녁에야 안양천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유엔군은 한강을 행주나루에서 도하해 강 건너의 행주산성을 점령하기로 했다. 19일 저녁에 시도한 첫 번째 도하는 실패했다. 인민군의 방어를 경시했던 것이다. 20일 새벽 4시 준비사격을 시작했고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강습도하에 성공했다. 9시40분경 2백여 인민군을 사살하고 목표 고지인 행주산성을 점령했다. 행주나루뿐 아니라 김포나 영등포에서도 한 차례씩 고전을 겪고서야 진공할 수 있었다. 22일 영등포를 포위 공격했고 23일 한강 인도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미7사단 31연대 32연대는 수원 방면으로 진출했다. 낙동강에서 북상하는 유엔군과 연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22일 수원비행장을 확보했다. 이로써 인민군은 남에서 서울 방어를 지원하는 것도 차단됐다.
한미 해병은 21일 저녁에는 백련산-104고지(지금의 궁동근린공원)-68고지(성산근린공원)를 잇는 능선을 확보하고 서울 중심부를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인민군은 안산-연희 56고지 능선과 노고산-와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금의 연희로를 두고 서북의 한미 해병과 남동의 인민군이 대치한 것이다.
한국 해병의 공격목표는 연희 56고지였다. 해병 1대대가 22·23일 전력을 다해 공격했으나 300여 사상자를 내고는 미군 해병대에게 임무를 넘겨야 했다. 미 해병대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운데 F중대는 생존자가 7명에 불과할 정도 전투가 치열했고 젊은 병사들의 목숨을 쏟아부었다. 24일 야포와 폭격 지원을 받으며 D중대를 투입해 격렬한 전투 끝에 연희 56고지를 점령했다. 연희고지를 점령함으로써 한미 해병은 서울 서측의 주진지를 돌파했다. 연희 56고지는 전초기지가 아닌 주진지였고 곧 서울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처절했다. 고지를 점령한 D중대는 26명만 생존했고 중대장 스미스도 전사했다. 이런 연유로 안산-무악정-연희 56고지-와우산을 잇는 인민군의 방어선을 스미스 능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그곳에는 1500여 구의 시체가 즐비했다. 공격한 자도 방어한 자도 물러서지 않고 그곳에서 죽었다. 이게 전쟁이다. 생각해 보면 전투에서의 명령이란 지휘관이 자기 부하들에게 죽는 순서를 매겨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