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열린 이승만기념관 건립추진 규탄 기자회견에서 청년대학생겨레하나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달 23일 서울시의회 임시회 시정질문에서 이승만기념관 건립 장소로 송현광장을 언급했다.
연합뉴스
오 시장이 부각되기 전에 이 논쟁에서 시선을 끈 사람은 2006년에 이어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승리한 김문수 경기도지사였다. 김문수 지사는 무상급식을 표방하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에 맞서 2009년부터 이 논쟁에서 두각을 보였다.
김문수는 무상급식에 한 푼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7월 22일 KBS 라디오 '열린 토론'에서 그는 경기도의회가 도교육청의 급식 예산을 전액 삭감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러면서 "가난한 학생부터 무료급식을 확대하는 것이 맞다"며 선별직 복지를 내세웠다.
그해 12월 2일 자 <경인매일> '학교 무료급식 정책은 대표적인 포퓰리즘'에 따르면, 그는 그달 2일 도청 직원 월례조회 때 "학교는 밥도 중요하지만 선생님이 제일 중요하다"며 "학교가 무료 급식소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훌륭한 선생님 모시기, 과학 기자재 구입하기 등에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해 써야 하는데 온통 무료급식 해서 밥 먹이고 치우자고 한다"라며 "이것이 대표적인 포퓰리즘이다"라고 폄하했다.
이렇게 김문수가 두드려졌던 논쟁이 2010년 6·2지방선거를 계기로 오세훈이 두드러지는 논쟁으로 변모했고, 오세훈은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를 벌였다가 투표율 미달로 주민투표가 무산되면서 서울시를 나가게 됐다. 무상급식 찬성론이 이미 대세가 된 현실을 무시하고 거대한 태풍에 맞섰다가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무상급식 논쟁에서 오세훈 시장보다 먼저 부각됐던 김문수 지사는 별 탈 없이 태풍을 피해 갔다. 6·2 지방선거로 경기도의회가 여소야대가 되고 도의회가 도지사의 중점 사업에 대한 예산을 삭감하자, 그는 '무상급식' 대신 '친환경 급식'을 내세우며 무상급식을 사실상 수용했다.
무상급식 논쟁과 이승만기념관 논쟁의 공통점은 시대적 대세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오세훈 시장이 재선 1년 만에 허무하게 물러난 것은 1990년대부터 서서히 형성된 학교급식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에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관한 우리 사회의 공감대는 이미 64년 전에 형성됐다. 5·18민주화운동이 44년이나 지났지만, 6월항쟁이 37년이나 지났지만, 촛불혁명이 8년이나 지났지만,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아직 헌법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4·19는 3년 뒤의 1963년 헌법에 들어갔다. 이승만을 몰아낸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비교적 일찍 형성됐던 것이다.
1963년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 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라고 선언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성립시킨 1972년 헌법에서도 '4·19 의거' 표현을 유지했다. 이승만에 대한 항거가 정당하다는 공감대가 시대적 대세가 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모든 보수정권이 4·19를 존중한 것은 아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1980년 헌법에는 4·19가 들어가지 못했다. 이 헌법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한 제5공화국의 출발에 즈음하여"라고 선언했다. 4·19를 빼먹고 3·1운동과 제5공화국을 곧바로 연결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7년 뒤 6월항쟁으로 전두환을 심판하고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1987년 헌법에 넣었다. 이승만에 항거한 4·19를 '불의에 항거한 4·19'로 표현함으로써 '이승만=불의'의 등식을 만들어냈다.
이승만에 대한 항거의 역사적 의의를 감추고 이승만에 관한 공감대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시도는 전두환 정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반역사적인 도전에 오세훈 시장이 발을 담갔다. 윤석열 정권은 이 일을 반드시 성사시킬 것처럼 말하지만, 지난 2년간 각종 정책 집행에서 나타난 윤석열 정권의 리더십을 감안하면 기념관 성사는 결코 녹록지 않다.
반역사적일 뿐 아니라 성사 가능성도 불투명한 일에 오세훈 시장이 서울시민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발을 담갔다. 13년 전에 시대적 대세를 거역했다가 역풍을 맞았던 그가 이번에도 서울시장 명찰을 가슴에 붙인 채 동일한 우를 범하게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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