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0월 3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
연합뉴스
전두환은 노태우·이학봉·허문도 등과 함께 정권의 대주주나 다름없는 허화평·허삼수를 숙청하는 방법으로 영부인 리스크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장영자 사건으로 이순자가 타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3년 뒤의 제12대 총선은 그 같은 전두환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전두환이 1982년에 대충 봉합한 장영자 사건이 1985년 2·12총선 때 전면적으로 재점화됐던 것이다.
이 선거의 후보자 등록은 1월 28일 마감되고, 이틀 뒤부터 안양·광명·시흥·옹진 등을 필두로 합동연설회가 개시됐다. 이로부터 며칠 사이에 가장 많이 거론된 이슈가 장영자 사건이다. 너무 식상하다는 평이 불과 일주일 만에 나왔을 정도다.
서울 용산구 삼광초등학교 합동연설회 때에서 이런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해 2월 7일 자 <조선일보> 특집기사는 "서울 삼광국민학교에서 열린 마포-용산 지구 합동연설회에 모인 2천여 명의 시민들은 이번 선거의 단골 메뉴인 장영자 여인 사건, 정래혁씨 사건 등에 대한 후보들의 공박에 대해서는 이미 식상한 듯 별 호응이 없었으나 '나는 안 찍어주어도 좋으니 민정당에게만은 표를 찍어주지 말라'는 4개 야당 후보들의 똑같은 발언에는 많은 사람이 박수로 호응"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불과 며칠 새에 유권자들의 뇌리에 못이 박힐 정도로, 야당 후보들은 장영자 사건과 정권의 관계를 적극 비판했다. 2월 2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만섭 한국국민당(국민당) 총재는 전날 대구 중·서구 합동연설회 때 "장영자 사건 등의 배후에 권력이 있다고 생각, 내가 조사하자고 제의했으나 민정당은 배후에 권력이 없다며 반대"했다는 비화를 공개했다.
훗날 1992년 대선에서 6.4%를 득표하게 될 신민당의 박찬종 후보는 부산 중구·동구·영도구 합동연설회 때 '민정당이 장영자 돈을 쓰지 않았느냐'는 발언을 했다. 2월 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는 2일 남일국민학교 유세장에서 "이 정권이 장영자 사건 등 각종 금융부정사건을 통해 2조 원을 털어먹었으니, 유권자들은 1인당 2천만 원씩 받고서 민정당에게 표를 찍어주라"고 호소했다.
서울 성동구에서 민주한국당(민한당) 후보로 출마한 조세형(1931~2009)은 이런 발언도 했다. 2월 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는 무학초등학교 합동연설회장에서 "내가 지난 10년간 꼭 보고 싶은 낯짝이 3개 있는데"라고 한 뒤 "그것은 김대중 씨를 납치해 동해 바다에 처넣어 죽이려 했던 자, 광주사태를 지휘한 자, 장영자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의 낯짝"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낯짝들이 세 개가 되려면 "광주사태를 지휘한 자"와 "장영자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가 각각 별개가 되어야 한다. 전두환과 이순자를 포함한 3개의 낯짝이 연상되도록 발언을 했던 것이다.
'영부인 리스크' 숨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 1985년

▲1985년 2월 7일 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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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덮었다고 생각한 영부인 리스크가 총선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으니, 전두환 정권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을 더욱 당황시킨 것은 여당 2중대이자 위성정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의 태도였다. 이들마저 장영자 이슈의 '쏠쏠함'에 매료돼 있었다. 닷새 앞으로 다가온 투표일을 앞두고 각 정당들이 마무리 전략을 마련 중이라는 2월 7일 자 <경향신문> 톱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민한당은 이번 합동유세 결과를 중간 분석한 결과, 서울·부산 등 대도시의 경우 정치문제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경제문제에서는 장영자 사건 등 대형 금융 부조리 사건의 빈발에 대한 공세가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지방의 중소 도시나 농촌의 경우 지방경제의 활성화와 소·돼지값, 추(秋)·하(夏) 곡가 문제 등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판단, 대정부·여당 공세를 이런 측면에서 집중 강화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정통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은 물론이고 관제 야당들까지 영부인 이슈를 제기하는 당혹스러운 상황 앞에서 민정당은 너무 허술한 논리로 대응했다. 장영자 사건이 박정희 정권 때의 부조리가 낳은 산물이라는 식의 대응을 보인 것이다.
위 2월 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에서 신정사회당 후보로 출마한 고정훈 전 조선일보사 논설위원은 "민정당이 컴퓨터와 전자두뇌까지 동원해서 야당의 공격을 방어하라는 자료를 보면 대형 부정사건이 박 정권 때 곪은 것이라고 하는데, 장영자가 육영수 여사의 친척이고 김철호가 육영수 여사 아버지의 심복이냐"고 비판했다. 장영자가 이순자가 아닌 육영수 쪽 사람이냐는 말로 민정당의 논리를 반박했던 것이다.
이 선거에서 전두환 정권은 장영자 사건과 영부인 리스크의 늪에 빠졌다. 2월 8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전북 무주·진안·장수에서 민한당 후보로 출마한 오상현은 "현 정권이 장영자 사건과 의령 총기사고 등 각종 사건사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끝낸다고 끝낸 영부인 리스크가 꽤나 질기게 이어졌던 것이다.
2·12 총선은 1960년 5·16 쿠데타 이후로 가장 높은 84.6%의 투표율을 기록한 선거다. 이 선거로 민정당은 많은 것을 잃었다. 총 276석 중에서 148석을 얻어 과반 의석은 확보했지만, 득표율은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35.2%였다. 전국구(비례대표) 의석 배분 방식 덕분에 과반수를 차지했을 뿐이다.
영부인 리스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 선거는 위성정당인 민한당을 몰락시켜 민정당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정통 야당인 김대중·김영삼의 신민당을 거대 야당으로 만들어줬다. 이를 발판으로 신민당은 전두환 정권을 거세게 몰아붙여 1987년 6월항쟁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6월항쟁의 초석이 된 1985년 총선의 핵심 이슈가 장영자 사건과 영부인 리스크였고 이것이 유권자들의 정권심판론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는 점은 영부인 리스크를 숨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준다. 이순자 리스크를 봉합한 채로 근 3년 가까이 시간을 끈 것이 전두환 정권의 패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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