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안식년은 가족들 뒤에 가려진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심정화
처음에는 다소 장난스럽게 식구들에게 안식년을 얘기했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주부안식년에 대한 기사를 쓰고 연재까지 하게 되면서 주위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사실 안식년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서 주위의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차피 내가 시작한 일이니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주부안식년의 가장 큰 목표는 '안 해 본 일 하기'였다. 재미있을 것 같은 일들을 찾다 보니 라디오 만들기 수업에서 학창 시절부터 로망이었던 라디오 DJ가 되어보기도 했고, 비록 4주간의 체험 강습이었지만 꼭 배워보고 싶었던 해금도 배워봤고, 25년 전 한비야 작가의 여행기를 읽고 나서부터 내내 꿈꿔왔던 혼자만의 여행도 다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부안식년이라는 주제로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기사를 써서 '시민기자'라는 과분한 타이틀도 얻었고, 평소 즐겨 보는 에세이 월간지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아 글을 싣는 뿌듯한 경험도 했다.
이렇게 소소하게 재미난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안식년이라고 해서 내 생활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식구들 챙기고, 주부로서의 일은 거의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껏해야 매일 쓸고 닦던 집안 청소를 일주일 정도는 미뤄둘 수 있게 되었고, 매번 직접 담가 먹었던 김치를 가끔은 사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기사까지 쓰며 요란하게 안식년을 부르짖은 덕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남편에게 저녁 설거지를 떠넘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간의 안식년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행복하면서도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 초조했고, 점점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워킹맘들에 대한 열등감만큼이나 전업주부로서도 완벽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는 마음도 컸다.
에너지를 채우니 가족이 더 잘 보였다
하지만 안식년을 보내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이 너그러워졌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최선을 다해서 한 가정을 꾸려왔고 두 아이를 건강한 젊은이로 키워낸 나 자신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또한 그동안에도 내 인생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걷기 시작한 것이 혼자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되었고, 집안일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마음을 다독였던 것이 지금 이렇게 기사를 쓸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처럼 나는 그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휴일에 하루종일 쇼파에 누워 있는 모습이 얄밉게만 보이던 남편이 언제부턴가 측은하게 느껴지고, 어느새 다 커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고, 늙어가며 점점 자식들에게 의지하시는 부모님이 애처롭게 느껴져 진심으로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만 생각하며 지내려고 했던 안식년에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커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가. 아마도 안식년을 가지며 내 안에 에너지가 충분히 채워지고 나니 가족들에게도 더 너그러워지게 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나를 위한 시간을 종종 가졌더라면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이 훨씬 덜 힘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주부가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한 것을 가족만 행복하게 만들려고 너무 애쓰며 살았던 것 같다.
이제 막 아이들에게 벗어나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려는 전업주부들에게 안식년을 꼭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족들 뒤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더불어 안식년을 원하는 주부들에게 가족들은 적극적인 협조와 응원을 보내주기를 바란다. 안식년으로 채워진 주부의 에너지는 결국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