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로 넥슨코리아 본사. 2019.1.3
연합뉴스
피로하다. '넥슨 집게손 논란'을 보는 내 심정이다. 믿는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이들을 설득할 여력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 개인의 피로감만 언급하고 넘어가기에는, 실체적인 위협이 있다. 디시인사이드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넥슨 본사 앞에서 열린 여성단체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칼부림하겠다고 위협하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논란이 된 넥슨 메이플스토리의 엔젤릭버스터 리마스터 애니메이션 홍보영상의 '집게손'을 만든 것으로 잘못 알려진 여성 창작자 A씨의 신상은 온라인에 무단 유출됐다. 일부 커뮤니티 유저들은 해당 영상을 제작한 넥슨의 협력업체 '스튜디오 뿌리'의 사무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직원들의 얼굴을 찍어 올렸다. 사과를 종용하는 원청업체 넥슨에 이어 일부 유저들로부터 실체적인 위협을 거듭 느낀 스튜디오 뿌리는 대표 명의의 사과문을 재차 올리고 A씨가 퇴사를 결정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후 뿌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입장문을 냈으며, A씨는 퇴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래서 또 쓴다. '집게손'에 대해서.
영상 검수한 남성 애니메이터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제가"
게임업계 전반에 암약하는 페미니스트가 비밀 결사의 상징처럼 곳곳에 심어놓는다는 표식으로서의 '집게손'에 대해서는,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인지 여러 기사와 칼럼이 이미 공박했기에 재론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경향신문은 4일 논란에 휩싸인 애니메이션이 에미상을 수상한 유명 남성 애니메이터, 김상진 감독이 만들고 검수했다고 보도했다. 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제가… (후략)"
문제는 사태의 가해자인 넥슨에 덧입혀진 피해자 서사다. 넥슨을 두고 '젠더 갈등'에 새우 등 터진, 혹은 '집게손'을 위시한 혐오 표현의 희생양으로 그리는 언론과 일각의 의견이 있다. 그러나 넥슨이 2016년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자에게 왕자는 필요하지 않다)가 쓰인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게임 <클로저스>의 김자연 성우를 교체한 일은 지금껏 이어진 게임 업계 여성 창작자에 관한 마녀사냥의 시초다. 이후 남초 커뮤니티들에서 SNS 등에서의 '페미' 이력을 문제 삼아 여성 창작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게임사가 이에 동조해 해당 스태프를 퇴출시키는 일은 게임업계의 고질병이 됐다.
복수의 언론에 따르면 이번 사태에서 넥슨은 제작사인 뿌리 측에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대신 사과문을 올릴 것부터 종용했다. 이어 넥슨은 지난달 26일 유튜브 방송을 통해 "맹목적으로 타인을 혐오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몰래 드러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 단호히 반대한다"(김창섭 메이플스토리 총괄 디렉터)는 입장을 밝혔다. '맹목적으로 타인을 혐오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몰래 드러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반대한다. 나도 그렇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가상의 적을 상정해놓고, 발본색원하겠다며 엉뚱한 피해자를 앞장서 양산하는 블랙 컨슈머가 있고 이에 기업이 동조한다면 이건 다른 문제다. 공격의 대상이 된 여성 창작자 A씨는 '집게손'을 그리지 않았으며 해당 영상의 다른 부분을 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A씨는 5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디시인사이드에 이름, 얼굴, 카카오톡, 네이버 블로그 등 신상이 유포되면서 각종 비난을 듣게 됐다"며 "X(구 트위터)를 통해 '한강 드가자'는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결과적으로 뿌리는 A씨에게 퇴사를 권유했다가 나중에 철회했다. 이는 매출의 대부분을 쥐락펴락하는, 거대 원청사 넥슨에 '납작 엎드리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라고, 뿌리 측은 경향신문에 전했다.
'nigga'와 '집게손'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