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인명사전>
이아림
이 사건은 그에게 '경력 단절'을 안겨줬다. 1896년에 유배형을 받은 그는 1907년 11월에 사면을 받았다.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에야 복권됐던 것이다.
복권되자마자 정만조는 새로운 후원자를 얻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만조 편은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대동학회의 평의원과 감사를 겸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이토의 후원을 받은 뒤에 그는 규장각 직각으로 근무하게 됐다.
고종이 이토에 의해 끌어내려지자마자 이토의 후원을 받았다. 고종에 대한 정만조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인 신하라면 이런 상황에서 이토의 후원을 받는 일이 꺼려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기꺼이 받았다는 것은 신하의 의리 같은 것에 개의치 않을 정도로 고종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11년간의 유배 생활이 그의 친일 행보에 큰 영향을 줬으리라 볼 수 있다.
대한제국 멸망 1년 전인 1909년에 그는 일본 시찰을 다녀왔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일본을 돌아본 그는 관광 소감으로 "그 지휘·보호의 불가불복종"을 거론했다. 일본의 지휘와 보호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소감으로 남긴 그는 그해에 정3품 규장각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의 국권침탈 뒤에도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옛 성균관인 경학원의 대제학도 되고 경학원 부설기관인 명륜학원의 총재도 됐다. 일제강점기 유교 교육의 중심인물이 된 것이다.
한국 황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 일제는 짓궂은 역할을 맡겼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당시에는 궁내부의 잔무 처리를 그에게 맡겼고, 요시히토 일왕을 무왕에 비유하는 시를 쓴 1915년에는 한국 황실의 제사와 종묘를 담당하는 역할을 그에게 맡겼다. 좋은 감정으로 제사 지내줄 수 없는 사람에게 제사를 맡겼던 것이다.
정만조는 대한제국 멸망 시점부터 1936년 사망 시점까지 일제의 녹봉을 받았다. 일제강점으로부터 26년 동안이나 친일 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이 외에 일왕이 주는 상장도 많이 받았다. 한국병합기념장, 요시히토 및 히로히토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훈6등 서보장,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다.
그는 유교 이념을 굴절시켜 일본 지배를 합리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단군신앙과 천도교 신앙까지 친일 도구로 활용했다. 1931년에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이 되고, 1934년에는 천도교인들이 만든 시중회의 평의원이 됐다. 한국인의 사상과 관념을 이용해 일본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종교의 벽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일본의 영향력 강화에 이용하는 모습은 윤석열 정권 출범 뒤에도 있었다. 강제징용에 관한 전범기업들의 책임을 은폐하고 한국 정부에 전가하기 위한 '제3자 변제 방안'을 관철시킬 목적으로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운운하며 한일관계를 그 시절로 되돌리자는 선전전으로 한국 여론을 교란시켰다.
2023년 지금의 한일관계는 김대중 집권기가 아닌 박정희 집권기와 유사하다. 기시다 내각이 윤 정권을 움직여 복원시킨 것은 1965넌 당시의 한일관계다. 그렇게 할 계획이면서도 김대중을 운운한 것은 제3자변제를 반대하는 한국인들이 대체적으로 김대중을 존경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일제강점기 때도 당시의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주나라 무왕 등을 식민지배에 이용하는 양상이 전개됐다.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유학자 정만조가 이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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