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군관학교 사건을 보도한 1934년 7월 18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항입한 군관생은 전도에 육십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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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승곤 편에 "정의은이 국내에서 모집한 다른 5명과 함께 담양을 출발하여"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정의은은 독립운동가 스카우트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이는 1934년 군관학교 사건에 연루된 데서도 느낄 수 있다.
그해 7월 18일 자 <조선일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사건은 정의은 같은 스카우트들이 국내에 잠입해 모집 활동을 하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위 이건상 논문에 따르면, 이 사건에 관한 일제 경찰 보고서 '군관학교 사건의 진상'에 정의은의 인적 사항이 나온다.
그 사건의 여파로 정의은은 그해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중국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했다. 그런 뒤 국내에서 순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1970년대에는 광주에서 양계업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것은 68세 때인 1980년 4월이다.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서적뿐 아니라 일제 경찰이 작성한 보고서로도 나타나듯이, 정의은은 부인할 수 없는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독립운동가 공인을 받지 못했다.
그가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을 의향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손자 정승환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시절에 김승곤을 만나 독립유공자 지정에 관한 부탁을 한 일이 있었던 듯하다.
이건상 논문은 "정의은은 김 전 회장을 만나 독립유공자 지정과 관련, 의열단 등 다양한 항일활동에 대한 증언을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의은의 매개로 중국 항일무대에 진출한 김승곤은 박정희 시절인 1977년에 서훈을 받았다. 그런 김승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승곤 편에 정의은과의 인연이 언급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승곤은 자신이 정의은에 의해 중국으로 인도된 사실을 인정했다. 김승곤이 이 사실을 부인했다면 그에 관한 공식 기록에 정의은의 이름이 실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증언을 거부한 것은 둘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 논문은 "해방 후 정의은과 김 전 회장은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라고 알려준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정의은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포기했다고 한다. 정승환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기록물을 손수 없애고 수해로 집안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서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고 말한다.
정의은에 관한 기록이 자손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을지라도, 대한민국 정부와 일제 경찰에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다. 그런데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 않다.
독립유공자를 찾아내는 일은 후손들의 몫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정부의 몫이다. 공식 문건들을 통해 독립운동 헌신이 쉽게 확인되는 정의은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의 책임 방기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보훈부가 백선엽 같은 친일파를 미화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는 게 과연 옳은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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