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퍽퍽 흙을 치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도구를 쓰라거나 분무기로 자주 물을 뿌려줘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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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준비된 점토를 낚싯줄처럼 생긴 도구로 자르고 치대서 구렁이 모양으로 만든 후 심봉에 하나하나 붙이는 것이다. 세부 묘사에 들어가기 전, 기본 덩어리를 만드는 이 단계에서는 보통 넓은 나무주걱이나 심봉을 세우고 남은 각목 등의 도구를 사용한다.
내가 입이 근질거리는 것은 보통 이때부터다. 묵직하고 단단한 흙을 때려 붙이는 작업을 반복하면 당연히 손목이 상하는데, 맨손으로 퍽퍽 흙을 치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도구를 쓰라거나 분무기로 자주 물을 뿌려줘야 한다는 주제넘은 조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콘트라포스토가 틀어지는 학생에게도 그쪽이 아니라 이쪽 어깨를 내려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꾹 참는다. 굳이 학생에게 말을 붙이고 싶다면 수업 중 교실이 아닌 쉬는 시간에 교실 밖에서 하는 것이 낫다. 무대 위의 모델은 말이 없는 법이니까.
사실 모델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입이 아니라 몸으로 표현해야 하고, 몸은 거짓말을 못 한다. 오랫동안 나를 불러주신 한 작가 선생님은, 내가 포즈를 취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멍때리고 있는지를 바로 알아보신다.
소홀하거나 진부한 자세가 반복되는 날엔 '오늘은 규리가 잡생각이 많구만'이라며 돌려서 타박하시기도 한다. 그걸 어떻게 아시냐고 여쭤보면, 하나하나 다 보인다고 하신다. 보여지는 자로서는 영 모르겠는 보는 자의 영역이다.
예비 작가의 작품에 임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은 이 일의 가장 큰 기쁨이다. 화실의 선생님들께서 전시를 하며 동료 작가들이나 평론가분들께 나를 모델로 소개시켜주셨던 날의 영광스러운 기분을 아직도 기억한다. 명함과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유명 작가의 뮤즈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오래 된 꿈이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에서 인체를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분들이 많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고, 모델 한 명만을 꾸준히 사용하는 작가는 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인체 주제의 전통이 남아있는 분야는 성상이 필요한 종교미술 정도이다.
뮤즈가 되고 싶다는 욕망과는 별개로, 사실 나는 1학년 1학기 수업을 꽤 좋아한다. 모델을 처음 써 본 학생들의 흥분과 열정이 나에게 까지 전해져서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신이 난다.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새 스케치북 첫 장에 내가 그려지는 것은 프로 작가에게 인정받는 순간 만큼이나 영광스럽다.
모델에게 자세를 지시해 본 적이 없는 학생에게, 능청스럽게 '저를 마음대로 쓰시면 돼요'라고 독려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포즈를 부탁하던 학생들도,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작품 구상을 설명한다. 콘트라포스토부터 배워야 하는 1학년일지라도, 매 학기의 작업은 예비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나중에 얼마가 될 지 모를 일이다).
한번은 그리스 여신 아르테미스가 활을 쏘는 자세를 표현하려는 학생이 있었는데, 뒷목이 저리고 팔은 떨어질 듯이 아팠지만, 휴일에도 학교에 나와 작업하는 그 학생의 진지한 자세에 나도 최선을 다하게 됐다. 그 학생이 A+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 일처럼 기뻤다. 도수치료와 파스를 달고 사는 직업임에도 내가 모델 일을 계속하는 이유다.
이번 학기도 어느새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중간고사 기간은 모델들에게 짧은 방학과 같다. 잠시 중단했던 이 연재도 다시 정비하려고 한다. 누드 모델 일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는 독자의 질문도 받고 싶다. 쪽지를 주시거나 이 글의 댓글로 질문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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