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에 취업한 노동자
연합뉴스
그리고 도망치다시피 취업한 곳이 대기업 직원 식당 주방 보조였다. 아직도 인생의 최대 암흑기로 기억하는 시절이다. 조리사와 식재료 전처리하는 사람을 빼면 남성은 혼자였다. 열 명 남짓한 여성들은 모두 60대 이상으로 몸 성한 사람이 없었다. 3D직업(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분야의 일)이라 60대 이하는 버텨내지 못했다.
출근 첫날, 팀장은 위아래를 훑어보며 "우선 일주일 일해보고 그 이후에 정식으로 계약하자"며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오기가 생겼다. 직함은 '주임'이었다.
"(벙거지처럼 생긴) 조리사용 모자, (두꺼운 비닐 재질의) 앞치마, 장화 받으세요. 조리사복은 지급은 하는데 별로 입을 일이 없을 겁니다. 고무장갑은 세 종류에요. 위생용, 전처리용, 설거지용입니다. 목장갑은 고무장갑 안쪽에 끼세요. 설거지할 물이 엄청 뜨겁거든요."
팀장의 경고는 사실이었다. 펄펄 끓는 대형 솥단지에 손을 넣었다가 통째로 익어버리는 줄 알았다. 아무리 중무장해도 고무장갑은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일부 녹아서 구멍이 뚫렸다.
이곳에서 하루 2000~3000인분의 그릇을 닦았다. 작은 그릇과 접시, 밥공기는 대형식기세척기로 돌리고, 덩치가 큰 주물냄비, 대용량 스텐 바트, 밥통 등은 일일이 세제를 묻혀 설거지했다. 6~8월 한여름 폭염 속에 세척 증기까지 뿜어져 나오니 숨이 턱턱 막혀 졸도할 거 같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면 기계는 인간의 인지속도를 넘어서 세차게 세제 액을 뿌렸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지만 쉴 수는 없었다. 앞쪽에서는 그릇을 넣고 뒤쪽에서는 세척·건조된 식기를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야말로 '인간기계'였다. 그렇게 하루 11시간을 일하면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퇴근 무렵 옷을 짜면 땀이 흥건하다 못해 검은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대가는 월 240만 원에 못 미쳤다. 3개월을 거의 다 채웠을 때 퇴행성관절염, 손목터널증후군 등 5개의 지병을 얻었다. 결국 주방을 떠났다.
이후 막노동을 시작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두 번째 암흑기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팔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팔뚝 근육이 나갔고, 병의원을 내 집 드나들듯 했다.
은퇴를 앞둔 사람이나 이미 은퇴한 사람 중 상당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종잣돈이라도 있으면 자영업, 돈이 없으면 생계유지를 위해 재취업에 나서지만 50대의 애매한 나이를 품어줄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라면집 창업은 꿈은 아직 접지 않았다. 여건이 된다면 작게나마 가게를 내고 싶다. 라면은 20대 청춘의 어느 언저리에서, 그것도 차디찬 자취방에서 시작된 나의 소울푸드(Soul Food)다. 그때의 라면은 가난을 상징했고 외로운 음식이었다. 라면처럼 가난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음식은 흔치 않다. 라면은 간식이 아니라 절박한 끼니였다.
'라면'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팅팅 불어 터진 면발을 보노라면 마치 불어 터진 심보 같다. 그 짭조름한 감칠맛은, 저렴하고도 습관적인 맛이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끓여야 더 맛있고, 배가 불러도 밥을 말아 먹어야 끝이 나는, 그 지난한 마무리는 습관이 아니라 위로다. 그 가난한 맛은 내 정서와 닮았다.
"아, 언제쯤 라면집을 차릴 수 있을까. 나를 위한 라면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라면을 끓이고 싶다."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 설치된 분식메뉴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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