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 8번>, 1915년, 마분지와 종이에 목탄, 뉴욕 휘트니 미술관 컬렉션
Georgia O'Keeffe Museum / SACK, Seoul, 2023
그렇다면 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그동안 횡행했던 걸까. 사람은 사람과 갈등하지, 돌이나 햇빛과 대립하지 않는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충돌이 일기 마련이고, 그 속에서 모두와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같은 갈등이라도 남성들의 갈등은 '개인'과 '개인'간의 의견차로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는 반면, 여성들의 갈등은 '여성'과 '여성' 사이의 질투로 인한 대립으로 보는 데 있다.
여성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여자'라는 성별로 뭉뚱그린 것 자체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남성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남성 관람객이 가득한 콜로세움에서 여성이 검투사 노릇을 하며 '자기들끼리' 싸우는 광경은 재밌는 구경거리였을 터이다.
게다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은 가부장적 권력 구조를 강화하는 부가적인 효과도 낳았다. 많은 식민지 정책들이 증명했듯, 권력을 갖고 있는 쪽은 권력을 갖지 못한 쪽이 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리에서 떨어진 사자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약자집단에 '너희의 적은 바로 너희 자신'이라는 일정한 딱지를 붙이면 그들의 행위와 삶을 일정한 방향으로 강제할 수 있다. 여성 스스로가 한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먼저 입에 올려보자. 그 순간부터 다른 여성들과 연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말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연 조지아 오키프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평소 귀가 닳도록 들었더라면, 자신의 작품을 흔쾌히 애니타 폴리처에게 보낼 수 있었을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따라서 사회가 남성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여성은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역설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라는데, 나는 왜 남자들 사이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던 걸까? 그것은 남자 입장에서 여자인 나는 우정을 나눌 '친구 후보 리스트'에도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나는 그들에게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보호하고 돌봐야 할 '여동생' 같은 존재이거나, 굳이 경계하고 날을 세우지 않아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알아서 사라져주는 '들러리'이거나, 어쩌면 잠재적 연애 대상인 '여자'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내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마음을 나눌 기대가 없는 그들이었기에, 내 행동과 말에 그다지 큰 에너지를 쏟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그들의 그런 한 수 접는 '담백한 태도'에 편안함을 느꼈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수평적 관계에서 우정이라는 꽃을 피우려면 우리는 우리의 '머리'와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이 맞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하고, 행동하기 전에 이것이 선을 넘는 것인지 상대를 서운하게 하는 일인지 한 번 멈칫하고 신중해져야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우정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이를 회피하고 '감정적 게으름'에만 빠져 지내다 보면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느 순간 내 주위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정이라는 선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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