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와이어스, <대낮의 꿈>패널에 템페라, 1980년, 미국 아먼드 해머 박물관/ 2023 Wyeth Foundation for American Art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SACK, Seoul
'헬가 시리즈' 중 하나인 <대낮의 꿈>을 보자. 벳시가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벳시에게도 익숙한, 작은 창이 딸린 다락방의 침대. 그 위에 헬가가 벌거벗은 채 잠을 자고 있다.
이날 아침에도 헬가는 벳시와 간단히 인사를 나눴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순진하게 미소 짓는 벳시를 뒤로 한 채, 헬가는 비밀스럽게 다락방으로 올라가 와이어스 앞에서 옷을 벗었을 것이다. 덮개처럼 침대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투명한 망사 때문일까. 헬가는 이때 이미 마흔을 넘겼지만, 마치 소녀처럼 보인다.
어쩌면 벳시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름답게 그려진 헬가의 누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경계심이나 긴장감 없이 누워 자는 헬가의 '편안함'이 벳시에게 상처로 남지 않았을까.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헬가가 와이어스의 모델이 된 지 10년째인 1980년이다. 나체상태가 편안해지기까지,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의 무게를 실감하고 벳시는 아득해졌을 것이다.
과연 와이어스와 헬가는 어떤 관계였을까. 한 기자가 생전의 와이어스에게 "당신은 헬가를 사랑했는가?"라고 묻자, 그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그리는 화가도 있는가. 그러나 나는 헬가를 그림의 대상으로서 사랑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라고 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세월이 좀더 지난 후 와이어스는 보다 대담한 발언을 덧붙였다. "나와 다른 화가들의 차이점은, 내 경우 모델과 개인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매혹되어야 한다. 빠져야 한다. 그것이 내가 헬가를 봤을 때 느낀 점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벳시가 '헬가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와이어스의 누나 캐롤라인에 따르면 벳시는 '헬가 시리즈'를 보며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게다가 와이어스는 헬가를 만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일정 부분 베티 탓으로 돌리기도 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벳시한테는 힘들었으리란 걸 알고 있어요. 나는 뭘 그리든 절대로 자유가 필요했으니까요. (...) 절대 자유. 내 아버지가 그랬듯 내 아내도 나를 옥죄어 오기 시작한다는 느낌을 나는 받았고, 좀 벗어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절대 자유'를 부르짖으며, 와이어스는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헬가만을 비밀리에 초청했지만, 벳시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벳시는 비록 미묘한 표정을 지었을지언정 처음부터 와이어스와 헬가의 관계에 대해 "그것은 사랑입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왜였을까. 어쩌면 주위로부터 그것이 '예술가의 아내'의 숙명이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고, 그것이 현명한 여성이 보여야 하는 성숙한 태도라고 줄기차게 주입 당해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에 대한 대가는 확실했다. 벳시는 '금성의 여왕' 자리를 얻었다. 세간의 입방아가 이를 방증한다. '역시 와이어스의 아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와이어스를 이해하는 것은 벳시 뿐이다. 벳시는 특별하고,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고, 천박하게 굴지 않고 징징거리지 않는다.'
남자들이 '철이 없는' 이유는 철이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내에게 미안해하던 와이어스는 이후 점점 대담해져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헬가를 불러 노쇠해진 자신을 돌봐 주도록 했으며, 2007년 와이어스의 90세 생일파티에도 헬가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한 인터뷰에서 와이어스는 헬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헬가는 이제 가족의 일원입니다. 나는 그것이 모두에게 충격을 준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그림의 비하인드
▲앤드루 와이어스, <결혼> 패널에 템페라, 1993년, 개인소장. 2023 Wyeth Foundation for American Art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SACK, Seoul
와이어스는 헬가 시리즈를 끝낸 후인 1993년에 의미심장한 작품을 하나 그린다. 역시 <대낮의 꿈>처럼 잠든 사람의 모습이다. 와이어스는 이 작품에 대해 어느 날 아침 이웃집에 들렀다가 그 집 노부부가 창백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부부의 모습은 좀 으스스해보인다. 침대 속에서 그들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목만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지 도무지 정할 수 없었던 와이어스는 당시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던 보 바틀렛(Bo Bartlett, 1955~)과 함께 제목 짓기에 돌입했다.
'샛별' 같은 심심한 제목이 오간 뒤(실제로 열린 창문 밖으로 샛별이 보인다) 그들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부엌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벳시는 거실로 나오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결혼!"
그 순간 방 안의 공기는 바뀌었고, 그렇게 마치 시체 안치소에 있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것만 같은 이 그림의 제목은 <결혼>이 되었다. 빛으로 가득한 <대낮의 꿈>과 적막하고 황량한 분위기의 <결혼>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벳시는 어쩌면 <결혼>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와이어스에게 정말로 하고픈 얘기를 둘러 했을지 모르겠다. 철없고 공감 능력 부족한 '화성 출신' 남편이 그것을 알아들었을지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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