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스틸컷
더쿱
나에게 도도는 나나미의 마시로(립반윙클) 같은 존재다. 도도와 나는 7년 전 대학교 사회과학학술동아리에서 만났다. 자본주의, 페미니즘, 노동권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함께 공부하고 교내에서 세미나와 집회를 열고 행동하는 동아리였다.
도도는 말하기보다 눈을 가만히 맞추고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고 궁금한 게 있거나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없으면 말하지 않았다. 작은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가, 판단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인 눈빛이, 호랑이코와 닮았다고 자주 말했던 코가, 짙은 눈썹이 좋았다. 동아리에서 도도는 말수가 적고 조용해서 AI 같다는 놀림을 받았다. 도도는 조용한 게 아니라 고요와 침묵을 가진 사람이었고, 로봇 같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데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도도와 부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광안리를 걷다가 둘 다 공원이 가고 싶어서 40분을 걸어서 간 자성공원에서 오래 머물렀다. 유명하지 않은 곳에서 머무는 걸 둘 다 시간 아까워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던 오르막길과 동백나무가 기억난다. 늦겨울의 풍경과 공원을 찾던 동네 주민들을 구경하며 언제 흩어져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도도와는 지루하지 않게, 편안하게 영원히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무튼, 비건>을 읽고 채식을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됐을 때, 도도는 동물권을 공부하고 함께 채식을 시작했다. 그때 도도는 군대에 있어서 채식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채식을 시작하게 된 일상을 궁금해했다. 도도가 어렵고도 새로운 삶을 선택한 나를 지지해 줬다는 걸 알고 있다.
도도는 우울, 외로움, 허무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어땠냐는 말에 제일 처음 한 대답도 "외로웠어"였다. 삶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오래 지내 왔다고 했다. 도도에게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도도가 슬픔을 아는 사람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도도는 조언도 충고도 없이 내 눈을 마주 보거나 어깨를 감싸고 안아주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떤 날에 나는 메모장에 썼다. 도도가 내게 잘 살 거야, 잘 살아야 된다고 말해주어서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책임이 내게 있다.
도도는 언제나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사람. 언젠가 너도 내 곁을 떠날 거 아니냐고 방패막을 가장한 뾰족한 창을 들이밀었을 때 창 옆으로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와 창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일상에서 모멸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날에 힘들다고 연락을 하면 도도는 답했다.
"오늘 밤에 집에 돌아오면 많이 이야기 나누자."
많이 이야기 나누자는 말은 당장 눈앞에 놓인 힘든 순간을 한걸음 건너가게 해주었다. 내가 부정적이고 우울하고 회의적인 감정들을 더 편안하게 느끼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지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영화 내내 마시로의 모습에 도도를 겹쳐 봤다. 마시로가 죽으면서 나나미를 떠난 것처럼, 도도와 나도 7년의 연애를 끝내고 친구가 되었다. 도도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 시절이 끝났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가 연애를 끝내던 날, 도도에게 나는 말했다.
"네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참 많았어. 고마워."
도도는 내게 말했다.
"나는 너를 만나기 전엔 단 한번도 나를 멋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어. 네가 나를 멋있는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믿어줬기 때문에 그걸 처음으로 믿게 됐어."
나나미가 마시로를 알게 되면서 행복과 편안함을 알게 된 것처럼 이완된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도도를 통해서 알았다. 편안함은 내게 가장 좋은 거다. 살아남기 위해서 불편한 걸 견디는 걸 강요하는 사회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곁에 있어줄 거라고 믿게 해준 도도에게 건강과 하고 싶은 일을 해낼 용기와 환경이 주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립반윙클(마시로)'의 '신부(나나미)'같은 관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쉽게 내쳐지고,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폭력을 겪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혼자서 울거나 힘들어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울렁거린다. 더 이상 길에서, 방에서, 어딘가에서 고립된 채 쓰러지는지도 모르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없으면 좋겠다. 이 마음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세상을 향해서 했던 두 번째 기도다.
* 다음 필자는 조준호 작가입니다. 나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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