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피사로, <잔느의 초상>1893년, 캔버스에 유채,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카미유 피사로
잔느가 12살이 되던 해, 카미유 피사로는 딸의 초상을 그렸다. <잔느의 초상> 속 그녀는 화사한 옷을 입었지만, 표정은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잔느는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어쩌면 아버지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것도 '화가가 되고 싶다는 허영을 자극할 수 있다'며 엄마의 성화를 샀을 수도 있다. 이때 잔느는 이미 죽은 언니의 나이를 넘어섰다. 특별히 사랑했던 딸을 잃은 엄마의 슬픔을 대신 갚기 위해서라도, 엄마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됐을 것이다. 그녀는 '착한 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을 터. 잔느를 제외한 5명의 아들은 엄마의 반대 없이, 아버지의 격려만을 받으며 화가 수업을 이어갔고 화가, 에칭화가, 풍자만화가, 다양한 장식품 디자이너로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잔느의 공허한 눈동자는 마치 작별인사를 하며 서서히 멀어지는 꿈을 좇고 있는 것만 같다. 결국 잔느는 평생 엄마의 눈에 닿는 영역 안에서, 엄마가 능히 예측할 수 있는 '딸-아내-어머니'의 삶을 살았다. 엄마의 분신다운 생애였다. 잔느의 꿈은, 그녀가 낳은 아들 두 명이 대신 화가가 되는 것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요즘 딸들의 진정한 최선은
내게도 쥘리 벨레같은 엄마가 있다. 설문조사 결과처럼 "나 없었으면 아빠랑 이혼하고 잘 살았을 사람"이 바로 슬프게도 우리 엄마다. 그러나 나의 엄마는 쥘리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젊은 시절은 가난하고 불행했지만, 나의 엄마는 적어도 내 꿈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나도 잔느같지 않았다. 나는 내 엄마에게 연민을 갖고 있었지만, 내 인생이 우선이었다. 하긴 19세기 사람과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모녀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있다. '친구 같은 딸'로 대표되는 정서적 지원에 대한 기대와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딸에게는 더 가혹한 상황이 닥친 것일지도 모른다. 남아선호가 판쳤던 대한민국에서 갑자기 '딸 둘 엄마는 금메달이고, 아들과 딸 한 명씩 낳으면 은메달, 아들 둘 엄마는 목메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단순히 봉건적 사상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장경섭 교수는 책 <내일의 종언>(가족 자유주의와 사회 재생산 위기)에서 이렇게 설명
한다. "아들을 통해 기대했던 세대 간 계층 상승 욕구가 딸을 통해서도 충족되면서, 양육과정의 정서적 보상감 뿐만 아니라 고령화로 급격히 연장될 노후의 자녀와의 관계 등이 반영됐다"라고.
저자가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는 곧 요즘의 딸은 '여자 얼굴을 한 아들'과 같다는 뜻이다. 아들보다 보상과 환수가 쉬우며, 남자만큼 돈도 벌면서 애교 있고 다정한 성격으로 효도하는 존재. 딸들에겐 '이중의 굴레'인 셈이다.
어느 벨기에인 한국불교전공 교수가 '효'를 어떻게 설명할지 오랫동안 고민하다 "기독교의 원죄같은 개념인데, 대상이 부모다"로 정리하고 강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한, 엄마와의 관계는 벨기에 교수의 말대로 영원히 벌 받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한때 나도 가엾은 내 엄마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렇게 속죄하듯, 내 전부를 다 쏟아부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최선은 그런 것이 아님을. 그것은 그저 '희생'일 뿐이라는 것을.
엄마와의 관계에서 딸의 진정한 최선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행복하게 사는 것일 터이다. 이는 얼떨결에 내 목에 걸려있던 '딸 둘 금메달'을 내려놓으면서, 나 스스로에게 주문하는 '엄마로서의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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