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이즈하라항의 풍경. 2008년 촬영.
김종성
역지빙례는 일본 막부의 아이디어였다. 정조 임금 때인 1787년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 시대의 실권자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제안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거론된 역지빙례가 정조 임금 사후인 1811년에 실현됐다. 시간이 오래 경과된 것은 조선 측의 거부감 때문이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자국 사신이 에도가 아닌 대마도까지만 갔다가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역지빙례를 끝끝내 관철시킨 핵심 동기는 돈 문제에 있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환영 행사를 열고 선물을 증정해야 했기 때문에, 통신사의 방문은 일본 경제에 커다란 부담이 됐다.
2009년 1월 31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 주최한 '17~19세기 동아시아 지식 정보의 유통과 네트워크' 국제학술대회에서 제임스 루이스 옥스퍼드대학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통신사가 에도까지 방문하면 일본 농업생산량의 3~12%에 상당하는 비용이 지출됐다. 이로 인한 부담감도 1811년 역지빙례의 원인이 됐다.
그렇지만 일본이 오로지 재정 부담 때문에 역지빙례를 제안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은 그 이전에도 재정 부담을 감내하며 조선통신사를 대접했다.
조선 후기에 일본이 국교를 체결한 나라는 조선과 유구뿐이었다. 청나라·네덜란드와는 통상관계만 맺었을 뿐이다. 조선이 유구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으므로, 일본이 국교를 맺은 나라 중에 가장 중요한 나라는 당연히 조선이었다. 일본이 비용 문제를 감수하면서까지 조선 사신을 환대한 것은 조선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일본이 도쿠가와 이에나리 시대에 역지빙례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비용 문제에 대한 부담감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두드러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문화를 전달해 주고 경제·외교적으로도 앞섰던 조선이 '이제는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인식이 18세기 후반에 퍼진 결과다.
1991년 12월에 학술지 <경제사학>에 수록된 정성일의 '역지빙례 실시 전후 대일무역의 동향'은 "당시 막부 쪽이 내세운 것처럼 역지빙례안은 단지 재정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라며 "전과 달리 막부 안에서 조선을 점차 가볍게 보거나 심지어 멸시하기도 하는 이른바 조선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난 점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설명한다.
2006년에 일본어문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한기승의 <역지빙례와 정한론>은 실권자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유학자 나카이 지쿠잔의 <초모위언(草茅危言)>에 담긴 아래 대목들을 소개했다.
"천년이나 속국이었던 소이(小夷)를 시세에 따라 인교를 맺고 예로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원래 보잘것없는 사절을 지금은 속국이 아니더라도 이렇게까지 천하의 재속(財粟)을 기울여 응접할 필요는 없다."
한민족이 왜국의 속국이었다는 거짓 역사를 기초로 해서 "한민족을 어찌 예의로 대할 것인가", "보잘것없는 나라를 위해 재물과 곡식을 이렇게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 의식을 제기하는 글이었다.
위 발표문에 인용된 또 다른 문헌인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의 <조선빙사후의(朝鮮聘使後議)>에는 "조선을 어찌 예의로 대하겠는가"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논조들은 이전에도 일본에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로 유럽·중동·동남아와의 교역을 통해 일본 경제력이 크게 상승한 18세기에 막부의 조선 정책과 맞물려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 같은 조선 멸시론이 역지빙례 실현에 영향을 주게 됐던 것이다.
한국을 멸시하는 그 같은 풍조는 19세기 중후반의 한국 정복론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기승의 <역지빙례와 정한론>은 "노골적인 조선 멸시와 정한론은 이미 역지빙례의 의도 속에도 숨어 있었다고 보여지며"라고 평했다.
역지빙례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통신사선이 대마도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 크게 바뀌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재정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을 중시하던 일본이 대놓고 조선을 무시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나온 현상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일본 역사에서는 통쾌한 기억이었고, 조선 역사에서는 불쾌한 기억이었다. 그런 불쾌한 기억이 하필이면 윤석열 정권의 대일 굴욕외교 하에서 오는 8월 재현된다.
조선통신사선은 대마도 동쪽 일본 본토까지 갔다 오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 역사를 무시한 채 대마도에서 돌려보내는 의식을 또다시 재현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이왕에 재현하는 것이라면, 일본 본토까지 갔다 오도록 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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