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보니 그럴싸> 11화 10여 년간 끈질기게 쫓았던 '안 영감'의 정체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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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 13일 자 <동아일보> 머리기사에 따르면, 이 신문 취재진과 권중희 일행이 함께한 자리에서 안두희는 "김창룡 특무대장(당시 육본 정보국 방첩대장)의 사주를 받아 범행했다"라고 진술했다.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의 정보기관장인 김창룡이 거사 후에 "안 의사 수고했소"라는 칭찬까지 해주었다고 증언했다.
안두희는 미국과의 관련성도 언급했다. 정보기관인 OSS(전략사무국)에 소속된 미군 중령이 "김구는 국론 통일을 방해하는 암적 존재"라는 말을 했으며 자신은 이를 '백범을 살해해야 한다"는 강한 암시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안두희가 미군 정보장교를 만난 시점은 OSS가 중앙정보국(CIA)으로 개편(1945.10.1)된 이후였다. 그렇기 때문에 OSS 장교를 만났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이를 근거로 안두희의 '미국 배후설' 언급이 거짓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OSS가 CIA로 개편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 때문에 암살 당시의 안두희는 습관적으로 OSS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혹은 일부러 명칭을 틀리게 발음해 미국 배후설 폭로의 파장을 줄이려 했을 수도 있다. CIA를 OSS로 말한 부분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증언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을 언급한 부분이 강압에 의한 것이라며 그는 진술을 뒤집었다. 이런 일이 계속 되풀이됐다. 그래서 암살 배후에 관한 안두희의 진술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종전의 단독 범행 주장이 흔들렸고 미국과 이승만이 거론됐다는 점은 의미 있는 변화다.
특히 이승만과 관련해서는 꽤 구체적인 진술이 나왔다. 1992년 9월 24일 자 <동아일보> 1면 좌단은 안두희가 이 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백범 암살 6일 전인 지난 49년 6월 20일 경무대 대통령 집무실로 불려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얘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잘하라'는 격려를 받았다"라고 밝힌 사실을 보도했다.
김구는 제2의 독립운동인 남북분단과 한반도 냉전을 반대하다가 경교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제주 4·3항쟁(4·3사건)에서도 나타났듯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분단과 냉전질서를 반대하는 세력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암살 배후일 거라는 심증을 갖게 됐지만,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권중희 같은 인물이 출현해 한국인들의 의문과 분노를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안두희에게 무서운 존재

▲권중희 선생으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받고 누워있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와 가해자 권중희.
권중희 제공
그런데 안두희를 정말로 두렵게 하는 존재는 권중희만이 아니었다. 안두희가 신변의 위기를 겪은 시점들을 종합해 보면 그 존재의 실체가 드러난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석 달 뒤 15년형으로 감형된 안두희는 뒤이어 잔형을 면제받고 장교로 복귀했다. 그런 다음 전역해서 떼돈을 벌였다. 강원도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해 도내에서 손꼽히는 거액 납세자가 됐다. 군부대를 상대로 거부를 축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승만 정권의 비호가 명확해진다.
그렇게 강력한 비호를 받던 그가 위험해진 것은 1960년부터다. 4·19혁명이 벌어진 이해에 안두희를 체포하자는 여론이 일어났고,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했다(A). 그런 속에서 이듬해 4월 17일 '백범 김구 선생 살해진상투쟁위원회'의 김용희 간사가 안두희를 체포해 서울지검 차장검사실로 끌고 갔다(B).
1965년에는 백범독서회장 곽태영이 칼을 들고 안두희의 목을 찔렀다(C). 1987년에는 바둑 친구 권중희가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D). 권중희의 응징은 1991년(E)과 1993년(F)에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에 버스 운전사 박기서가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안두희의 목숨을 끊었다(G).
A와 B는 4·19 혁명으로 한국 민중의 역량이 크게 고양된 시기에 발생했다. C는 한일협정 강행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박 정권의 폭력성이 고조되는 동시에, 이에 맞서 한국 민중의 저항도 함께 고조된 시기에 일어났다.
D는 1986년 필리핀 피플 파워와 1987년 한국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한국 민중의 에너지가 재차 고조되고 미국과 한국 정권이 일시적으로 위축된 시기에 발생했다. E·F·G는 탈냉전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국가권력이 위축되고 민중의 역량이 강해지던 시기에 발생했다.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1991년 8월 14일에 증언한 일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된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1990년 전후에 시작된 탈냉전 시기에는 국가폭력이나 국가범죄를 해결하기 위한 민중의 노력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나타났다. 이런 시기에 권중희가 국민적 응원을 배경으로 안두희를 응징했던 것이다.
한국 민중이 강해질 때마다 '안 의사'의 신변이 위험해졌다. 이는 한국 국민의 전폭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김구 암살의 배후를 제대로 규명하기 어려운 현실과 연관돼 있다. 분단과 냉전을 반대한 김구가 암살당한 일은 한반도 정세의 근본 구조와 맞닿는다. 이런 일의 진상을 밝히려면 국민적 지원이 절실하다는 점을 안두희의 신변 문제는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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