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인권 시민단체들이 2022년 11월 4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KBS에 근로시간 준수 등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희망연대본부
노동시간도 역시 문제다. 정규직들은 주 52시간 제도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하지만 비정규직들에겐 오히려 윤석열 정부의 주 69시간 제도도 반가울 지경이다. 방송이 나가는 것에 모든 스케줄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하루 24시간을 다 채워서 며칠 밤을 새우는 노동이 매우 흔하다. "방송이 나가야 한다"는 명제는 현장에서 그 어떤 노동법, 방송법, 또는 헌법보다도 강력하다.
조부상을 당하고도 장례식장에 가지 못한 PD, 바뀐 방송 스케줄 때문에 섭외를 새로 해야 하는 작가, 태풍이 오고 산불이 나도 촬영을 나가야 하는 스태프들은 너무 흔한 얘기이고, 코로나에 걸려도 드라마 제작이 멈출까봐 얘기를 안 하고 버텼던 경우도 있었다. 방송 비정규직, 특히 프리랜서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방송 스케줄에 차질을 빚으면 안 된다. 바로 밥줄이 끊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기의 몸을 갈아 넣어가면서 방송을 만들 수밖에 없다.
산에서 촬영하다 다리가 부러졌던 한 PD는 자기가 다쳐가면서 만들었던 방송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자신이 마무리를 못 하고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재보험도 적용받지 못하고, 치료받는 2~3달가량 일을 못 했기에 돌아올 직장도 없어졌다. 방송작가들은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계속해서 자료 조사와 섭외 전화 때문에 손에서 일을 놓을 수가 없다. 사무실에서 9 투(to) 6를 지킨다고 해도 업무는 24시간 계속된다.
방송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첫 채용에서 갈라진다. 1년에 100여 명을 뽑는 방송사 직원 채용에 정직원으로 채용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 또는 부서별로 경력직을 뽑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기존의 정규직이 물갈이될 뿐이다. 종합편성채널이 처음 생겼을 시기, 외주업체에서 경력을 쌓은 프리랜서들이 정규직으로 옮겨간 경우가 있었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쉽게 말해 방송사는 정규직 문 자체가 좁다. 필요로 하는 제작 인력은 많은데 뽑을 수 있는 정규직은 적은 수로 정해져 있으니 방송사에서는 프리랜서 제작 인력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핑계로 계속해서 젊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쓰이고 버려진다. 많은 수가 화려한 방송계를 동경해서 들어오지만 처음부터 정규직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비정규직으로 형광등보다도 짧게 쓰이고 버려지곤 한다.
외국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방송계에선 전 세계적으로 비정규직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한국만큼 차별이 극대화된 곳도 흔치 않다. 영국의 경우 비정규직의 평균임금은 정규직과 비교했을 때 약 87%로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는 정확한 데이터가 없지만 40~50%로 추산된다. 해외의 방송 비정규직들은 정부의 관리 또는 (노동)조합의 협상으로 권리를 보호받고 있지만 한국에선 아직 먼 이야기이다.
이러한 방송 비정규직의 현실에 정부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국회가 국정감사에서 요구한 자료도 방송사는 불성실하게 제출한 경우가 많고, 아예 제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방송사는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에도 협조하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아예 손을 댈 수도 없는 지경이다. 그나마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채널 사용 사업자의 재승인권을 가지고 압박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정치권의 입김으로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방송 현장의 비정규직 문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그 어떤 정부 조직이나 국회도 단독으로 나설 수가 없다. 방송사들이 '언론의 자유'를 휘두르며 방패막이 삼아 숨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해외 하청기지 되면..."

▲방송사에서 방송 스케줄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방송 스태프들은 며칠 밤을 새우는 일이 예사다.
셔터스톡
방송사의 정규직들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하고 무력하다. 바른 언론, 공정한 언론을 외치던 노조 출신 사람들도 경영진이 되고 나면 정치적 방향과 관계없이 비정규직들을 가차 없이 밟아버리고 고용노동부, 노동위원회, 법원의 명령에도 행정소송을 걸어 몇 년씩 소송전을 끌고 간다.
방송사들은 현재 자신들이 사용하는 비정규직의 현황을 전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부서에서 다양한 형태로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다. 갈수록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다양화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갈수록 기존 방송의 수익성은 낮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바일과 온라인 미디어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몇몇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제작비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제작비가 줄어들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이 인건비이다. 제작여건은 갈수록 악화되고 인건비도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신규인력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아우성을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이미 중간층만 남고 연차가 높거나 낮은 인력들이 오히려 적은 분포를 여러 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방송에서 일하는 만큼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10년을 일하든 20년을 일하든 급여 인상에 대한 기대도, 고용안정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오래 일해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한국 방송계가 망하고 다른 나라의 하청 기지화되면 오히려 더 나은 노동조건이 될 거라는 한탄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드라마 제작에서는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을 통해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방송계가 살아남기 위해선 현재의 이중적인 구조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방송사의 비정규직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방송사는 이미 자정능력을 잃어버렸다. 언론에 흔들리지 않을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사회 전반에 걸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분배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김기영 /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장
김기영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기영은 약 20년 차 프리랜서 PD이고 방송 비정규직들이 모여 2018년도에 만든 공공운수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의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KBS 다큐멘터리, MBC <뉴스데스크>, SBS <물은 생명이다> 등 여러 방송사의 방송을 제작했습니다. 현재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의 주 52시간 근로 적용, 프리랜서 PD와 작가들의 결방 대책 등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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