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9 21:05최종 업데이트 23.05.19 21:05
  • 본문듣기
지난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던 1991년 4월 24일 당시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는 시위 도중 경찰관 5명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휘두르는 쇠 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집회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한 대학생이 시위 중 무지막지한 국가폭력으로 소중한 생명을 잃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욕망이 있다. 하지만 강경대의 비극적 죽음을 시작으로 전남대생 박승희(4월29일), 안동대생 김영균(5월1일), 경원대생 천세용(5월3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며 분신했다. 이어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의문사(5월6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아래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5월8일), 노동자 윤용하 분신(5월10일), 시민 이정순 분신(5월18일), 노동자 정상순 분신(5월22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시위 도중 압사(5월25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 분신(6월1일) 등이 이어졌다. 1991년 4월에서 6월의 이른바 '분신 정국'이었다.


당시 이러한 분신 정국에 대해 김지하(1941-2022)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로 망자들을 비난했다. 또한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1941-2019)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근거 없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박홍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지금)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 제비뽑기를 통해 죽을 사람을 정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근거도 구체성도 없는 거짓 증언으로 박홍은 레드 콤플렉스가 팽배한 남한 사회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다. <조선일보>는 그런 박홍의 주장을 아무런 여과 없이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유교적 교육열과 '신분 질서'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 신부이자 대학 총장인 그의 말 한마디가 끼친 영향은 컸다. 그런 박홍이 1994년 7월 청와대 오찬에서 '결정적 발언'을 한다. "대학 내에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으며...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또 그로부터 한 달 후인 8월 박홍은 한 토론회에서 "1987년 이후 전국 대학에서 배출된 주사파 세력이 15000명에서 30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졸업 후 정치, 언론 등 각계로 진출했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런 '박홍 계명'에 대해 당시 <조선일보>는 아무런 검증도 없이 그대로 대서특필함으로써 남한 사회 매카시즘의 광풍에 뜨거운 기름을 퍼부었다. 당시 보수적인 검찰도 박홍 발언에 대해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지난 1997년 5월 법원이 "한국통신 노동조합에 대해 근거 없이 주사파 발언을 한 박 총장은 7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함으로써 박홍의 매카시즘 사기극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박홍 주연, <조선일보> 조연의 주사파 발언 소동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레드 콤플렉스에 노출되어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유서를 대신 써줬다? 
  

'유서대필' 강기훈 23만에 무죄 판결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이날 강 씨는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며 "저는 당사자로 재판받았지만 주변에서 똑같이 아파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 분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고 바람"이라고 말했다. 2014.2.13 ⓒ 유성호

 
한편, 지난 1991년 5월 8일 어버이날 아침 8시 김기설(1965-1991)은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과 강경대 죽음에 대한 경찰의 사과를 요구하고 몸에 휘발유를 뿌린 후 투신해 사망했다.  

김기설이 사망하자 경찰은 분신 현장을 확인한 다음 사건 관계인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1991년 5월 13일 검찰은 당시 명지대생 강기훈에게 김기설을 소개받았다는 홍아무개의 진술을 받았다. 다음날인 5월 14일 검찰은 강기훈의 형사사건기록을 입수했고, 이틀 후인 5월 16일에는 강기훈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김기설의 유서를 비롯한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적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필적감정을 의뢰했다.

노태우 정권은 김기설의 유서를 국정 전환 위기 돌파용 카드로 삼았고 이에 <조선일보>는 앞서 박홍 발언 보도에서처럼 조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서울지검은 김기설의 전민련 동료 강기훈을 유서 대필자로 지목해 수사를 진행했다. 이어서 1991년 7월 12일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해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강기훈을 기소했다.

그 후 서울지법은 1991년 12월 20일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해 준 사실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인정해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리고 서울고법이 유죄 판결을 선고한 후, 대법원이 1992년 7월 24일 상고를 기각해 판결이 확정되었다. 강기훈은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했다.

그리고 13년이 흐른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1991년) 당시 국과수 감정인은 공동심의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공동심의를 한 것으로 감정서에 기재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했고, 객관적 사실과 다른 자의적 감정 결과를 회신해 강기훈으로 하여금 유죄 판결을 받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며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했다.

그리고 강기훈은 진실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2008년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신청했다. 그 후 7년 만인 지난 2015년 5월 14일 사건 발생 24년 만에 마침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관련기사: 곽상도와 동료들의 끔찍한 과거, 왜 사과 안 하나 https://omn.kr/1m6zz).

<조선일보> 또...

김기설 분신 사건으로부터 32년이 흐른 지난 1일 노동절 아침 9시 36분, 윤석열 정권의 노동 탄압에 항의하면서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50)씨가 춘천지법 강릉지원 앞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에 불을 댕겼다. '뻥' 소리와 함께 그는 쓰러졌고 주변 동료들의 도움으로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전신 화상을 입고 이튿날 끝내 숨졌다. 그는 분신 전에 "정당한 노조 활동을 한 것뿐인데 윤석열 검사 독재정치의 제물이 됐다. 무고하게 구속되신 분들을 풀어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하지만 이런 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지난 16일 온라인 <조선일보> 최훈민 기자는 '건설노조원 분신 순간, 함께 있던 간부는 막지도 불 끄지도 않았다'라고 보도했다. 이런 <조선일보> 기사가 나오고 난 뒤에 원희룡(1964- ) 국토교통부 장관은 "노조가 국민의 죽음까지 투쟁의 동력으로 이용했다"며 비난하고 나섰다.

이런 원희룡의 비난을 접했을 때 지난 1991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근거도 구체성도 없는 거짓 증언으로 레드 콤플렉스가 팽배한 남한 사회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박홍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희룡이 누구인가? 그는 1980년대 중반 인천공단 경동산업 생산직 노동자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는 80년대 중반 서울대 학내 서클에 가담하고 시위에 앞장서다가 연행돼서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노동자나 일반 민중들의 의식이 깨어나 적극적으로 나서야 민주화가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장 노동자로 일했었다. 그리고 나중에 구로공단을 "인생 최고의 대학"으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원희룡은 김문수(1951- )처럼 '노조 혐오자'로 노조 공격 최일선에서 '총대'를 메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한편,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위 <조선일보>의 기사에 대해 같은 날 '인간이길 포기한 조선일보'란 제목의 성명을 내고 <조선일보>를 질타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민주노총 건설노조가 유족·목격자에 대한 2차 가해라고 한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17일 <조선일보> 지면은 "분신 노조원 불 붙일 때 민노총 간부 안 막았다"라는 제목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 보도했다.
 

건설노조 양회동 지대장 분신 관련 부적절한 기사를 온라인(5월 16일)에 이어 지면(5월 17일)에도 게재한 조선일보 ⓒ 민주언론시민연합

 
<조선일보>는 고인 양회동씨 분신 당시 상황이 미심쩍다며 유족과 목격자의 증언도 없이 소리도 안 나는 CCTV 화면만을 근거로 보도한 것이다. 분신 도구까지 사진으로 실어가며 유족과 목격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에 대해 지난 17일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과 건설노조는 기자회견을 열어 "(<조선일보>의 보도는) 여론을 선동하기 위한 악의적 보도"라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어서 <조선일보> 보도 자체가 "명백한 허위"이고 "유가족과 목격자에게 2차 가해를 자행"해 언론 윤리를 위반했으며, 보도에 쓰인 CCTV 영상 유출 경위에 대해 "검찰과 경찰의 조력"이 의심된다며 질타했다.

<조선일보>는 망자 곁에서 가장 아프고 힘들어할 동료를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아무리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조선일보>는 언제까지 그렇게 고인들의 죽음을 더럽히고 그 주변인들을 욕보이는 작태를 반복하려고 하는가? 다시 1991년으로 시간을 돌려 '분신 사망 사건'을 '유서 대필 사건'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관련기사]
'월간조선' 유서대필 의혹? 건설노조 "필적 감정 의뢰, 증거도 있다"(https://omn.kr/23ztj)
-"동료의 죽음을 투쟁 동력으로"... 원희룡의 막나가는 노조때리기(https://omn.kr/23zn3)
조선일보→정치권→보수단체 고발... "건설노동자 분신 덮으려는 큰 그림"(https://omn.kr/23zn7)
<조선>의 '건설노조 간부 분신' 왜곡, 대신 고개 숙인 언론인들(https://omn.kr/23yv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